열두 명의 유럽 여성작가들이 들려주는 환상적인 ‘메르헨’


‘이야기꾼’ 하면 보통 소설가나 직업적인 강담사 또는 만담꾼이나 변사 정도를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넓게 본다면 구전으로 전해져오는 설화의 경우, 이야기를 듣고 각색해서 옮기는 모든 이들이 ‘이야기꾼’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여성들은 생활 속에서 자연스레 이야기꾼의 자질을 갖추어왔다. 이웃집 아낙들과 수다를 떨면서, 밤마다 어린아이들의 머리맡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현실을 가공하고 환상을 덧붙여서 이야기를 지어내는 재주를 익혀온 것이다. 이야기의 매력은 여성성과 결부되면서 고단한 현실을 위로하고, 살아갈 힘을 주며, 때로 현실의 한계를 뛰어넘기도 한다.


자신과 동침한 여자들은 다음날 무조건 죽여버렸던 아라비아의 폭군 아래서 세헤라자드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여성적 지혜와 탁월한 이야기 능력을 겸비한 덕분이었다. 『그녀들의 메르헨』에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열두 명의 근현대 유럽 여성작가들 또한 여성 특유의 목소리로 환상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는 점에서 ‘세헤라자드의 자매들’이라 불릴 만하다.


원제가 『세헤라자드의 자매들 Scheherazades Schwestern』인 이 책은 로코코 시대에서부터 현대까지 300년에 걸쳐 열다섯 편의 ‘메르헨’을 소개하고 있다. 독일어로 ‘메르헨Ma..rchen’이라고 부르는 문학 장르는 우리말로 흔히 ‘동화’로 번역되지만 비단 어린이들만을 위한 이야기는 아니다. 자유로운 상상력을 동원한 모든 종류의 환상적인 이야기들 모두가 여기 포함된다. 그림 형제와 19세기 낭만주의 작가들이 발전시킨 메르헨은 현대작가들에게도 매력적인 장르여서 오늘날까지도 꾸준히 창작되고 있다. 이 책의 1부 ‘스핑크스의 미소’에는 루이제 린저, 셀마 라게를뢰브, 잉에보르크 바흐만 같은 20세기 최고의 여성작가들이 쓴 메르헨이 실려 있다. 2부 ‘달나라 공주’에는 고전주의 시대 아르님 모녀의 이야기가, 3부 ‘요정의 방’에는 18세기 로코코 시대 여성작가들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부드러운 방식으로 ‘더 나은 세계’를 지향한다


이 책을 쓴 여성작가들은 동화를 통해 불완전한 현실 세계에서 벗어난 ‘더 나은 세계’를 지향하고 있지만 그것은 결코 피안의 유토피아가 아니다. 어느새 일상 속에 강고하게 자리잡고 있는 인습들과 사회제도들을 부드러운 방식으로 자극하고, 인간이 지켜야 할 덕목, 정신적 교훈들을 깨닫게 함으로써 변화에 대한 열망이 자연스레 자리잡도록 만든다. 동화가 가지는 가장 커다란 환기 효과는 우리들의 무뎌진 공감과 연민의 능력을 다시 일깨우는 데에 있다.


“이 이야기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틀림없이 더 풍요로워질 것이고, 새로운 이야기들이 거기 합세할 것이다. 변형 가능한 동화의 서술형식이 일상의 현실성을 부수고 우리의 상상력에 새로운 관점을 활짝 열어줄 가능성과 자유를 끊임없이 제공하기 때문이다”라는 우르줄라 슐체(엮은이)의 말은 동화가 가진 서술형식의 개방성이 일상으로부터의 해방을 추동해낼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여성작가들은 요정과 마녀, 괴물, 인간들과 의사소통이 가능한 동물 등 환상적 요소들을 설득의 도구로 사용한다. 이들은 인간이 처한 현실과 추구해야 할 이상적인 세계 사이의 ‘매개자’ 역할을 담당한다. 주인공을 시험에 빠뜨리거나 역경에서 구해주는 가운데 인간의 비정함을 드러내보이거나 반대로 추구해야 할 미덕을 제시한다.


이 책에서 보여주는 주제는 사회연대에서부터 모성애, 페미니즘,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 현대인들의 불안과 소외, 탐욕과 이기심, 역경을 극복해낸 사랑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여성적 글쓰기의 일부는 사회문제를 도외시하고 일상과 내면세계에 집착한다는 이유로 폄훼되기도 하지만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보편적인 사회문제를 여성적 감수성으로 포착했다는 점에서 폭넓은 설득력을 획득하고 있다.



1부 ‘스핑크스의 미소’ ─ 19 · 20세기의 환상적인 이야기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여성작가들은 앞선 시대 여성들과는 달리 교훈을 명시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암시적이며 사색적인 방식을 통해 보여준다. 앞선 시대의 메르헨 작가들이 보여주었던 사회연대를 지향하는 관점은 그대로 계승하면서도, 다변화된 시대의 다양한 문제들을 넓게 포용하고 있다. 「쥐주전자 이야기」는 부자와 가난한 자들의 소통을, 「온 곳 없는 펠리치타스」는 신분 철폐를 이야기한다. 「트롤의 아이」는 자신의 아이와 뒤바뀐 괴물의 아이마저도 끌어안는 모성애를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새」에서는 기이한 새를 통해 현대인의 불안한 내면을 섬세하게 포착하고 있으며, 「어리석은 이야기」는 페미니즘의 발달사를 유머러스하게 그리고 있다. 「스핑크스의 미소」에서는 자가당착에 빠져 스스로 자멸해가는 잔혹한 폭군의 모습을, 「쌍둥이 형제」서는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인간들의 편협함을 그려내고 있다.

2부 ‘달나라 공주’ ─ 아르님 모녀가 들려주는 이야기
2부에서는 아르님 모녀의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낭만주의적 서간 소설로 유명한 베티네 폰 아르님은 프랑크푸르트에서 구전되어오던 이야기들을 정리해 짧은 세 편의 동화로 엮었다. 이 책에 소개된 「왕자」, 「수염 없는 한스」, 「앞 못 보는 공주」가 그것이다. 단순한 줄거리 속에서 압축된 인생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 특징이다.


딸인 기젤라 폰 아르님은 여기서 한층 더 세련된 동화 형식을 보여준다. 기젤라는 문학 살롱인 ‘카페터 서클’에서 활동하면서 ‘계기 문학 작품’ (그때그때 특정한 계기나 경우에 따라 창작되는 이야기들)을 주로 써냈다. 크리스마스 경품 제비뽑기를 위해 지은 「과자로 만든 집」은 흥미진진한 이야기 속에 소외된 이웃에 대한 관심을 담았다. 대표작인 「달나라 공주」에서는 환상과 현실을 하나로 섞으면서도 현실의 어두운 면을 더 나은 것으로 바꾸어놓으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3부 ‘요정의 방’ ─ 로코코 시대 여성작가들의 이야기
‘프랑스 동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샤를 페로가 요정 이야기의 유행을 만들어내자 귀족 계급 여성들이 적극 참여하기 시작했고, 이는 결과적으로 18세기 로코코 시대의 이야기 형식을 성립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 시기의 여성작가들은 전통적 동화와 전설의 모티브를 결합해서 교훈적인 성격이 강한 이야기들을 주로 만들어냈다.


「아름다운 금빛머리 아가씨」는 은혜를 은혜로 갚은 동물들 덕분에 공주와 결혼하고 신분상승하게 되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통해, 「과부와 두 딸」은 위선은 더 큰 위선을 부르고, 진실한 마음은 행복의 결과를 부른다는 이야기를 통해 인과응보의 주제를 뚜렷이 드러내고 있다. 「파슬리 공주」는 사랑의 힘으로 심술궂은 마력에서 벗어나는 두 남녀를 통해 인간의 덕성이 마법의 힘을 이기고, 벌은 반성과 통찰의 기회가 됨을 강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