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설터의 34년 만의 장편이자 유작
그의 작품 중에서도 으뜸인 “찬란한” 소설


제임스 설터가 2013년 『올 댓 이즈』를 발표했을 땐 이미 두 해 뒤면 아흔이었다. 그가 등에 업어온 “작가들의 작가”라는 수식어는 사실 더없는 찬사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대중성과의 거리를 짐작케 하는 것이었다. 이런 미사와 수십 년을 같이한 작가라면 대중적 성공에 대한 욕구를 이기지 못하고 지쳤을 법하지만, 제임스 설터는 자신의 성향대로 우직하게, 글이 “원액”에 가까워지도록 쓰고 기다리고 퇴고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 88세의 나이에, 한국전쟁에서 전투기를 몰던 한때의 호기로운 모습답게, 『솔로 페이스 Solo Faces』(1979) 이후 34년 만에 장편소설 『올 댓 이즈』를 발표하여 그동안 바라왔던 대중적 인지도까지 끝내 거머쥐었다. 유명 작가들이 모두 거쳐 가지만 그에게는 지면을 내주지 않았던 <뉴요커>부터 <뉴욕타임스> <가디언> <뉴욕리뷰오브북스> 등 숱한 유력 매체들이 『올 댓 이즈』에 찬사를 던졌고, 이는 리처드 포드, 줄리언 반스, 퓰리처상을 받은 존 반빌과 에드먼드 화이트 같은 명소설가들도 마찬가지였다.
1957년 『헌터스 The Hunters』로 데뷔해 반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제임스 설터가 남긴 작품은 장편 6권, 단편집 2권, 시집 1권, 너덧 권의 에세이가 전부다. 그만큼 그는 넘치는 정력에 가쁜 숨을 쉬기보단 한 문장 한 문장 길고 고르고 정확한 호흡을 담았다. 그러한 문학 생활의 정점이자 종지부를 찍은 것이 마지막 소설 『올 댓 이즈』다. <뉴욕리뷰오브북스>는 이 소설을 두고 “찬란하다. 지금껏 설터가 남긴 산문 중에서도 으뜸”이라고 말했다. 제임스 설터는 『올 댓 이즈』를 출간하고 수많은 찬사 속에서 뒤늦은 전성기를 누리다가 2년 뒤인 2015년, 아흔의 나이로 뉴욕의 작가답게 뉴욕 주 새그하버에서 숨을 거뒀다.



임시적 만남들을 통해 공허를 메워가는 한 남자의 일대기
완전한 허구로 볼 수 없는 진솔한 소설


『올 댓 이즈』는 제2차 세계대전 중 해군으로 태평양전쟁에 참전했던 한 미국 남성의 일대기다. 주인공 필립 보먼은 전쟁이 끝나고 대학을 나와 기자로, 출판사 에디터로 비교적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가는 동안 숱한 사람과 만나고 헤어지며 마음속 공허함을 메워간다. 맞지 않는 사람과의 결혼과 이혼, 공허감을 메우기 위한 임시적인 연애들, 뉴욕의 단골 카페와 레스토랑, 에디터로 일하면서 맞닥뜨리는 작가와 동료 그리고 출판계의 다채로운 모습과 일화들. 제임스 설터는 사소해 보이는 일상을 차곡차곡 쌓아가며 필립 보먼의 삶을 구축한다. 수없이 스쳐 가는 사람과 장소,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를 만남들로 가득 찬 필립 보먼의 인생을 통해 삶의 의미를 탐색해나간다. 전후 경제적 부흥 속에서 목적 없이 지나온 미국 중산층 남성 삶의 전형이 제임스 설터의 잔여물 없는 정확한 문체와 젊고 감각적인 대화들에 담겼다.


전적으로 꾸며 만들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개념, 그리고 이처럼 꾸며 만든 글을 픽션으로 분류하고 꾸며내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 다른 글들은 논픽션으로 부른다는 개념이 너무 독단적인 구분이라고 생각돼요. 우리는 대부분의 위대한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은 전적으로 꾸며낸 게 아니라 완벽하게 알고 자세히 관찰한 것에서 비롯했다는 걸 알고 있어요. 그런 작품들을 꾸며낸 거라고 말하는 건 부당한 표현이에요.
-<파리 리뷰> 인터뷰, <제임스 설터> 신문에서


『올 댓 이즈』는 많은 언론과 독자가 예상했듯이, 제임스 설터의 마지막 소설이 되었다. 이 작품이 마지막이 될 걸 작가 스스로도 예감했는지 작품 곳곳엔 제임스 설터의 취향과 기억이 짙게 배어 있다. 픽션을 온전히 꾸민 것으로는 보지 않았던 그가 삶을 정리하는 단계에서 쓴 작품. 어느 때보다 진솔하고 여유롭지만 치밀한 문장으로 전하는 한 미국 남성의 일생에서 이제는 고인이 된 제임스 설터의 모습을 그려보는 즐거움도 느낄 수 있다.



뉴욕 중산층 남자 필립 보먼이 사는 법
사랑, 연애, 만남들에 깃든 우연성과 그 뒤의 삶


혼자인 어머니 그리고 이모부 내외와 사는 필립 보먼. 제2차 세계대전 중 해군으로서 태평양전쟁을 겪고 돌아와 대학을 졸업하고 기자가 되길 희망하지만, 이내 현실을 깨닫고 뉴욕에서 출판 에디터의 길에 들어선다. 성공하거나 실패한 작가, 그리고 여러 출판업자들을 만나며 비교적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가지만 마음 한쪽엔 어쩐지 공허함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던 중 뉴욕의 한 펍에서 남부 여성 비비언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혈기에 앞서 결혼까지 이어간다. 하지만 두 사람은 관심사도 살아온 배경도 다르다. 그들의 대화엔 알 수 없는 끊김이 있고, 결혼 생활 곳곳엔 미세한 틈이 있다. 그런 날들을 보내던 중 장모의 간병을 위해 잠시 곁을 떠나 있던 비비언이 편지로 일방적인 이혼을 통보한다. 까닭을 알 수 없는 갑작스러운 이별로 혼란스러운 필립 보먼. 그 뒤 깊고 얕은 수차례의 연애를 해나가지만, 연애 이후의 일은 기약할 수 없다. 다만 출판 일과 사랑 그리고 우연들을 통해, 사람들과 만나고 소원해지고 재회하며, 도시의 일상을 살아갈 뿐이다. 알 듯 모를 듯, 인과관계에 묶이지 않고 어디론가 흘러가는 삶. 필립 보먼의 공허함은 어디에 가닿을까? 진정한 동반자는 언제 나타나고, 삶의 기쁨은 어디에서 찾아질까?


“실은 나 내일 떠나.”
“내일 가면,” 그녀가 말했다. “언제 다시 와?”
“나도 모르겠어. 회사 사정에 달렸겠지.”
그가 말을 보탰다. “날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
“어떻게 잊겠어?”
보먼은 그녀의 마지막 말을 머릿속에 넣어두고 수시로 떠올렸다. 사진만큼 또렷한 그녀 이미지와 함께. 그는 사진을 한 장 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하지만 다음에 만나면 한 장 얻어 사무실에 둘 작정이었다. 책갈피에 끼워서, 이름도 날짜도 아무것도 쓰지 않고. 혹시 누군가 우연히 그것을 발견하고 누구냐고 물으면, 일언반구 없이 그 손에서 낚아채리라 마음먹었다.
-160쪽


이 소설은 플롯으로 끌어가는 소설이 아니다. 우리가 시간 속에 어떻게 살고 있는지, 우리가 삶의 종잡을 수 없는 측면에 얼마나 무지한지 애잔한 인상주의적 시각으로 바라본다.
-<워싱턴포스트>


카페와 모임에서 문학을 이야기하고, 좋은 음식점을 찾아 드라이브를 하고, 회사 경비로 출장 겸 여행을 하고, 그러면서 만난 사람과 사랑을 하다가 ‘그냥 그렇게 됐어’ 하는 식으로 헤어지는 삶. 잊지 못하게 좋아해도 헤어질 수 있고, 수십 년을 잊고 지내다 어제 만난 사람처럼 조우할 수도 있는 날것의 삶을 제임스 설터는 필립 보먼과 그 주변인들의 소소하고 달콤쌉쌀한 일화들로 그려낸다. 삶은 우연과 기대로 시작해 체념과 후회로 이어질 수 있지만, 끝에 다다르기 전까지는 알 수 없고 섣불리 판단할 수도 없다. 그래서 예측할 수 없는 우연과 인연이 빼곡한 『올 댓 이즈』 인물들의 삶은 특별한 사건이나 개연성 없이도 생생하고 위태로우며, 기대를 자아낸다.


언제나 실리를 추구했다. 베스트셀러가 될 만한 것은 마다하지 않는 게 원칙이었다. 그가 말했듯, 적게 지출하고 왕창 파는 게 목표였다. 그의 집무실 벽엔 편지 한 통이 든 액자가 걸려 있었다. 친한 동료이자 나이 많은 편집장이 어떤 원고를 읽고 써 보낸 것이었다. 두 번 접힌 자국이 있는 편지지의 내용은 명쾌했다. [이 책은 싹수가 없어요. 깊이 없는 인물들이 독자를 짜증 나게 하는 스타일이에요. 사랑 이야기가 너무 천박하고 시시하네요. 아무도 사 보지 않을 거예요. 음란한 상상만 자극할 뿐 일고의 가치도 없어요.]
“그게 20만 부 팔렸어요.” 바움이 말했다. “지금 영화로 제작되고 있고요. 우리가 낸 책 중에 제일 히트 친 거예요. 잊지 않으려고 벽에 걸어놨어요.”
-37~38쪽



“넘치기보단 부족한 것이 낫다”
생략을 통해 더 많은 것을 말하는 설터의 문장


설터를 읽는 큰 기쁨 중 하나는 그가 소소한 인물들의 삶에 뛰어드는 방식에 있다. 누군가 어떤 순간 행동을 하기까지 그리는 데 고작 몇 개의 문장을 사용해서는 그에 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그러고선 그들이 존재하도록 내버려둔다. (…) 그 문장들은 시간 자체를 팽창 그리고 수축시키는 것 같다.
-<에스콰이어>


제임스 설터의 또 다른 대표작 『가벼운 나날』을 읽고 작가 줌파 라히리는 “넘치기보단 부족한 게 낫고, 글이 원액이 되도록 졸여야 한다고 제임스 설터에게 배웠다”라고 <파리 리뷰> 기고에서 말했다. 인물들의 성격이나 인물 간의 갈등과 그 해결을 굳이 설명하지 않는 것은 제임스 설터 글쓰기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하지 않고, 내뱉으려다 삼킨 말이 더 진솔하고 풍성할 수 있음을 제임스 설터는 마지막 소설 『올 댓 이즈』에서 여실히 보여준다. 만남은 우연히 촉발될 수 있으며, 인연이 끝나는 이유는 다양하고 또 미묘하다. 제임스 설터는 쉽게 재단할 수 없는, 그러한 인연으로 가득 찬 삶을 말을 아껴 그려낸다. 그의 인물들은 말해지지 않은 여백 안에서, 그리고 독자의 머릿속에서, 나름의 이유와 방식으로 생생하게 살아가다가, 책장을 덮으면 어디선가 잘들 살고 있을 것처럼 아련하게 다가온다. 모든 일이 지난 뒤 점점이, 덧없이 다가오는 기억 속의 사람들. 만남도 헤어짐도 결국엔 ‘다 그런 거야’ 하고 말하는 제임스 설터 말년의 통찰이 『올 댓 이즈』에 담겼다.


전후 미국의 황금기를 배경으로 수많은 주변 인물까지 장중하게 묘사하며 그들의 본성을 두루 포착한다. 신기하게, 몸짓 하나와 대화 몇 마디만으로. 이 작품은 기억처럼 구성되었다. 불규칙하게 연상을 일으키고 곁가지를 친다. 작중인물들이 독자에게 회상처럼 다가온다. 온전하고 덧없이.
-<데일리 텔레그라프>



추천사


무미건조한 결혼 생활, 출판사 일로 조우하게 되는 여러 유명 작가들에 대한 스케치, 파티에서 만나게 되는 여러 중산층 남성들, 여성과의 대화나 잡담들, 유리잔처럼 부서질 듯 즉흥적이고도 임시적인 연애 이야기들, 이혼과 그 후 침상의 여자에서 여자로 이어지는 에피소드식 낭만과 뉴욕에서 파리로 또 여러 유럽 도시들로 날아다니는 한 미국인 남성의 이야기가 잔잔하게 펼쳐진다. 뉴욕을 중심으로 하는 다문화적 배경의 매력적인 중산층 인물들, 혹은 필립이 다니는 출판사를 중심으로 조우하게 되는 보헤미안적 지식인들의 이야기는 때로 상당한 문화적 깊이와 에로틱한 얽힘의 임시성을 보여주는데, 그 모든 것이 전후 아메리카의 물질적 성장 속에 허덕이는 현대인들의 황폐한 미궁과 존재의 임시성이라는 허무의 초상이다.
1925년 뉴저지에서 태어난 제임스 설터는 90년이라는, 거의 한 세기에 걸친 삶을 살았다. 이 삶을 살면서 그는 인간 속에 깃든 부정할 수 없는 깊은 어둠과 허무를 직시하며 냉혹하리만큼 간결한 문장으로 그것을 옮겼다. 그는 “맑은 표면과 어두운 내면의 독특한 화합물과 같은 소설을 쓰는 작가”라는 평을 받는데, 『올 댓 이즈』는 그러한 비평에 걸맞게 제2차 세계대전 중 태평양전쟁에 참전했던 한 출판업자 남성의 허무와 권태, 사랑과 연애, 만남들에 깃든 위험성을 ‘맑은 표면과 어두운 내면의 화합물’로 잘 보여준다.


김승희 시인, 서강대 국어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