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영상시대의 詩


최근 우리 시대의 문화 지수는 ‘영화 관객 1천만의 시대’, ‘인터넷 이용인구 3천만 명 육박’과 같은 압도적인 수치들로 나타나고 있다. 자극적이고 휘발성 강한 디지털 영상 매체들이 그야말로 무서운 속도로 몸피를 불려나가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최근 ‘텔레비전’이 ‘시’를 다루기 시작한 것은 다소 의외의 현상이다. 언뜻 보기에 ‘시’와 ‘텔레비전’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1초라도 시청자들의 시선을 놓치지 않으려 하는 ‘스펙터클’한 텔레비전이 과연 시의 은근함을 기다려 줄 수 있을까? 시는 과연 텔레비전의 즉물성에 포획되지 않고, 그 섬세함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을 것인가?


여전히 의구심은 남지만 시인들이 직접 텔레비전에 출연해 다른 분야의 예술가들, 또는 연예인들과 한데 어울려 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시를 낭송하는 장면은 이제 더이상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되었다. 더불어 일말의 기대감마저 갖게 한다.


물론 시 읽는 프로그램이 몇 개 늘어났다고 해서 “시의 르네상스가 도래하는 것일까?”라고 묻는 것은 우스꽝스럽다. 다만 시심詩心의 회복은 곧 인간성의 회복일 것이기에 “시가 내게로 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반가운 일이다.


『시가 내게로 왔다』로 많은 독자들의 감성을 일깨워준 김용택 시인도 최근 두 번에 걸쳐 텔레비전에 출연했다. 〈대한민국 1교시〉‘감성詩대’ 코너에서는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이 정답일까?”라는 강박에서 벗어나 ‘나대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시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라는 편안한 시 감상법을 제안하기도 하고, 〈낭독의 발견〉에서는 직접 가르치고 있는 덕치초등학교의 어린 제자들과 함께 출연해 천진 소박한 시의 정서를 감동 깊이 전해주기도 했다.



근·현대 시사 100년에 빛나는 아름다운 우리 시 100편


공중파에서 ‘시’를 다루기 시작한 것은 최근에 부각된 흐름이지만, 출판 매체로서의 ‘시선집’, 또 그 시선집을 통해 시를 소개하고자 하는 시인들의 노력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온 일이다. 2001년에 <마음산책>에서 발간된 『시가 내게로 왔다』 또한 김용택 시인이 직접 고른 우리 시와 진솔한 감상글을 통해 ‘시와 대중의 만남’을 꾸준히 주선해왔다. 하지만 김용택 시인은 시선집을 엮은 뒤 이 책에 같이 묶이지 못한 시들 때문에 늘 마음이 무거웠다고 한다. 이에 첫 권에 미처 실리지 못했던 우리 시 52편과 외국시 3편을 모아 『시가 내게로 왔다 2』를 발간하게 되었다. 1권, 2권 모두 합해 우리 시가 총 100편이다.


이로써 근대 초창기 시에서부터 일제 강점기의 좌절과 염원을 노래했던 시들,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노래했던 시들, 4·19 혁명과 5·16 쿠데타를 연거푸 겪으며 시대의 허무와 모색을 노래한 시들, 민중들의 서러운 애환과 열망을 분출한 시들, 피폐해져가는 현대문명과 도시의 삶을 그려낸 시에 이르기까지 근·현대 시사詩史 100년에 빛나는 아름다운 시들이 두루 엮이게 됐다. 두 권에 걸쳐 수록된 이 작품들은 “우리들의 얼굴, 우리들의 모습, 우리의 산천을 닮은, 내 살과 뼈와 핏줄 같은” 시들에 다름아니다.



변함없는 약속 이행만큼 아름다운 일은 세상에 없다


시의 시대는 갔느니, 시의 위기니 하는 말들은 사실 공공연한 속설이며 장기화된 하소연이다. 하지만 시인들에게 있어서 이런 말들은 민감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김용택 시인은 ‘시의 위기’를, ‘정치의 위기’나 ‘경제의 위기’와 등가에 놓지 않기를 바란다. 시인에게 있어서 ‘시의 위기’는 ‘인류의 위기’이며 더 나아가 ‘모든 생명의 위태로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용택 시인은 ‘한 편의 시를 쓰고 나서 금방 또 시를 쓰려고 하는’ 시인들이 있는 한, 시의 멸종은 쉽게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또한 간직하고 있다. 때가 되면 틀림없이 오고 가고 맺고 지는 이 지상의 모든 생명들과 마찬가지로 시인들 또한 세상과의 변함없는 약속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나무와 새와 바람과 강과 산과 눈과 비가, 풀잎들이 해가 바뀌고 때가 되면 틀림없이 오고 가고 자라고 꽃피우고 열매를 맺는 이 지상의 약속처럼 시인들은 그렇게 시를 쓴다. 아름다운 일이다. 나무들이 새봄에 틀림없이 꽃을 피우고 잎을 피우는 일처럼, 이 세상과의 변함없는 약속 이행만큼 아름다운 일은 세상에 없다.” (「엮으면서」중에서)
김용택 시인은 ‘아름다운 약속’으로 피워낸 이 시들이 한 편 한 편 독자들의 마음에 가 닿기를 염원한다. 그리하여 독자들과 더불어 감동하고, 희구하고, 전율하고 싶어한다. 시인의 이러한 바람은 “시여 꽃잎처럼 날아가라, 사람들의 맨가슴 위로”라는 말에 애틋하게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