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의 합작, 악어이야기 - 터닝포인트, 제이크


『조경란의 악어이야기』는 주목받는 신예 일러스트레이터 준코 야마쿠사의 그림과 2003년 <현대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조경란의 자전적인 글이 어우러진 한국과 일본의 합작품이다. 작가 조경란은, 2001년 일본 <텔레비전 동경 テレビ 東京>에서 25회에 걸쳐 방영된 <전설의 악어 제이크> 원작 텍스트를 바탕으로 ‘터닝포인트’를 상징하는 ‘제이크’라는 악어 캐릭터 성격은 고스란히 살리되 자신의 일상 이야기 속에서 그 의미나 주제를 확장시키는 매우 독특한 작업을 시도하였다. 『조경란의 악어이야기』는 ‘일러스트는 글에 수반되는 것’이라는 기존의 고정관념을 깨고 외국의 좋은 일러스트를 발굴한 후, 국내의 작가를 섭외하는 방식으로 진행된 새로운 기획이다. 자전 소설인『코끼리를 찾아서』에서 자신의 고독한 내면을 코끼리를 통해 표현했던 작가는 이번에는 악어를 통해 자전적인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작가가 해석한 인생의 ‘터닝포인트’는 흔히 생각하는 극적인 반전이나 드라마틱한 사건들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자신에게 주어진 몫을 묵묵히 감당하고, 또 고민하며 나아가고자 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조그만 ‘힌트’ 같은 것이다. 『조경란의 악어이야기』는 자신의 처지와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명료한 자각, 그리고 작은 위로가 우리가 일상을 견뎌나갈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악어 ‘제이크’에 얽힌 전설을 접하게 되면서 자신의 삶을 공개할 용기를 내게 되었다고 말하는 작가 조경란은 한결 여유로워진 목소리로 자신의 작업실과 생활공간, 개인사와 가족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제이크를 발견한 순간은 어쩌면 일종의 터닝 포인트 같은 건 아니었을까. 그리고 제이크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변하고 싶을 때, 다른 삶을 꿈꿀 때 내 내면의 힘이 불러내오는 상징적인 존재 같은 것?” (19p에서)

야마쿠사가 그린 악어 ‘제이크’는 일본에서 애니메이션으로 방송된 후 곧이어 단행본으로 출간되면서 화제가 되었던 캐릭터다. 아프리카나 마다가스카르 섬, 그것도 아니면 동물원에서나 겨우 구경할 수 있는 악어가 그저 무심히 흘러가던 사람들의 일상 속에 느닷없이 나타난다는 설정부터가 독특하다. 제이크를 보았다는 사람들의 증언은 다양하다. 제이크는 성냥불꽃이나 싱크대, 베란다, 변기, 주머니 속, 전철 선반이나 책장 사이 등 소소한 일상의 풍경 가운데 ‘불현듯’ 나타난다. 사람들은 제이크를 발견하는 ‘순간’ 자신을 둘러싼 크고 작은 문제들을 자각한다. 직업에 대한 만족감이나 회의, 결혼이나 이혼을 둘러싼 문제들, 가까운 미래의 진로 계획 등을 둘러싸고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미처 몰랐던 사실에 대해 새로운 발견을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제이크를 보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커다란 위로를 받기도 한다.



조경란의 방 : ‘자기만의 방’ 에 놓여진 ‘4인용 식탁’


“여성이 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방과 돈이 필요하다”고 말한 버지니아 울프의 말은 이제 너무도 흔한 말이 되어버렸지만 많은 여성 작가들에게 충분한 작업환경을 갖추는 일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설령 ‘자기만의 방’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 환경은 열악하기 십상이다. 조경란 작가 또한 변변한 책상도 없는 옥탑방에서 8년 동안 집필활동을 해왔다.

오랫동안 두 여동생들과 함께 방을 써온 작가는 ‘밥상’을 들고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자신의 공간을 확보하고자 안간힘을 써야 했다. 그러던 어느날, 드디어 ‘자기만의 방’이 생기게 됐다. 옥탑방을 쓰던 막내여동생이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그 공간을 대신 차지하게 된 것. 하지만 옥탑방은 터무니없이 좁아, 책상을 들여놓을 공간이 없다. 절실하게 작업 공간이 필요했던 작가 조경란은 고심 끝에 책상을 대용할 물건을 들여놓았다. 그것은 다름아닌 ‘옥색 하이그로시 4인용 식탁’. 가끔씩 ‘서랍이 줄줄이 달린 나무로 만들어진 커다란 책상’을 꿈꾸기도 하지만, 책상을 들여놓기 위해서는 옥탑방 아닌 다른 공간을 찾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또 다른 비용이 든다. ‘까짓 책상, 이것도 좋은데 뭘’ 하며 마음을 다독이는 작가 조경란은 ‘가진 것은 없지만 예전보다 너그러워진 삼십오 세’ 인 자신을 자각한다.



조경란의 가족 : ‘어제는 비, 오늘은 맑음’


자신의 삶을 공개하기 위해 용기가 필요했다는 작가 조경란은 신산스러운 자신의 가족사 또한 조심스레 펼쳐놓는다. 가끔씩 우울증에 시달리는 작가는 이런저런 우울증과 관련된 책들을 챙겨 보며 마음을 달래다가도 자신의 가계에 혹여 우울의 유전자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한다. 자신의 생일날 손수 복어국을 끓여먹고 자살한 첫번째 할머니, 애인의 아파트에서 투신자살한 고모, 알 수 없는 병으로 야위어가는 삼촌, 그리고 평소에는 숫기없고 다정하다가도 술만 먹으면 폭력적으로 되는 아버지…….

어느 날, 술에 만취한 아버지를 피해 작가 조경란과 여동생을 포함한 세 모녀는 집을 떠나 근처의 모텔로 피신한다. 조경란은 경황없는 중에도 챙겨온 책을 읽으며 마음을 달래고, 다음날 동생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곱게 화장하고 출근길에 나선다. 끙끙 앓으며 하룻밤을 보낸 엄마와 함께 모텔을 나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날씨는 맑고 이웃집 옥상에는 흰 빨래들이 널려 있다. 조경란은 그때 ‘비가 내려도 난 괜찮아요. 해가 비치면 날씨가 좋은 거죠’ 라는 비틀스의 노래를 떠올린다. “사랑하고 싸우고 화해하고 용서하고 이해하는 것들의 반복이 지겨워 돌아서지만 딱 일주일만 지나면 그 모든 것들이 다 그립다”는 작가 조경란의 말에서 깊은 우울 한 켠에 잠복해 있는 낙관성을 발견해 낼 수 있다.



조경란의 여행 : 일상의 여독을 씻기 위한 작은 위로


지긋지긋한 일상을 견디다 한계점에 이르면 사람들은 탈출을 꿈꾼다. 일상의 굴레를 벗어나는 극단적인 형태는 탈출과 독립이다. 그것은 가장 쉬운 방법이면서도, 모든 문제를 덮어두는 미봉책일 수도 있다. 조경란은 애써 집을 나가려 하지도 않고, 독립을 못해 발을 동동거리지도 않는다. 집을 떠날 시간이 적절하게 찾아오면 결국 그리될 것이고,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부모와 함께 고요하고도 적적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또 한편, 결혼해서 아기를 가진 여동생들이 돌아와 편하게 해산할 수 있으려면 자신이 집에 남아 있는 것이 필요하리라는 배려도 잊지 않는다.

이처럼 일상을 수용하는 가운데서도, 그것을 견디기 위해서는 크고 작은 위로가 필요하다. 조경란에게 그것은 ‘여행’이다. 평소에는 사치를 하지 않는 그녀이건만 숙박비에 관해서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위한 작은 사치이다. 갓구운 베이컨과 커피향, 뽀송뽀송한 침구들, 강낭콩만한 비누와 빗과 투명한 샤워캡… 조경란은 일상의 여독을 씻어내기 위해 호텔의 쾌적함과 안락함을 충분히 즐긴다. 그 중에서도 조경란은 슈튜트가르트에서 묵었던 ‘시티 호텔’을 잊지 못한다. 2년 전 낭독회 차 들렀던 그곳에서 멋진 아침식사를 경험했던 조경란은 ‘지금이 내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한 시기라는 것’을 놓치지 않는다. 비록 한순간이나마 강렬한 행복의 체감이 소중하다는 것을 일깨우는 대목이다. 또한 ‘멀리 있는 호텔. 내가 여기에 있지 않다는 걸 확연히 느끼게 해주는 호텔. 그래서 내가 더 잘보이는 호텔. 그런 호텔이 좋다’는 대목에서 조경란의 독특한 공간 해석을 엿볼 수 있다.



조경란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96년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고 그해에 단편 「불란서 안경원」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첫 장편 『식빵 굽는 시간』으로 <문학 동네 제1회 신인작가상>에 당선되었다. 소설집 『불란서 안경원』 『나의 자줏빛 소파』 『코끼리를 찾아서』 장편소설 『가족의 기원』 『우리는 만난 적이 있다』 중편 소설 『움직임』을 출간하였다. 2002년에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2003년에 <현대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일러스트 준코 야마쿠사

1962년에 태어났다. 1985년 도쿄 조형造形 대학을 졸업했다.
<전설의 악어 제이크> 애니메이션 방송 25부작 프로젝트에 참가하면서 스타가 된 일러스트레이터다. 현재는 일본의 각지의 문화센터에서 목조 세공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