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만 하지 않으면 우리는 또 어디까지든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유레루> <아주 긴 변명> 니시카와 미와 감독의 글맛


일본의 영화감독이자 소설가인 니시카와 미와는 2002년 감독으로 데뷔한 이래 영화 <유레루> <우리 의사 선생님> <아주 긴 변명> 등을 연출하면서 이제는 자신만의 색깔이 확고한 감독으로 자리매김했다. 이 작품들은 칸영화제, 로마국제영화제, 토론토국제영화제를 비롯해 일본 유수의 영화제에 초청되었다. 그녀는 직접 만든 영화의 원안으로 소설을 집필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소설 『유레루』 『어제의 신』 『아주 긴 변명』은 일본을 대표하는 문학상인 미시마유키오상, 나오키상, 야마모토슈고로상 후보에 올랐다. 
『료칸에서 바닷소리 들으며 시나리오를 씁니다』는 첫 번째 산문집 『고독한 직업』에 이어서 니시카와 미와가 영화와 문학에 관해 쓴 책이다. 배우와 영화 스태프들의 이야기를 펼쳐 보인 전작의 맥락을 이으면서도 달라진 점이 눈에 띈다. 고독한 직업을 토로하던 저자가 동료를 믿고 의지하면서 감독으로서, 또 관계를 돌아보는 인간으로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2016년에 연출한 영화 <아주 긴 변명>의 제작기를 뼈대로 주연 배우, 촬영감독, 아역 배우, 연출보, 음악 담당 등과의 소중한 기억을 하나하나 구체적이고 밀도 있게 담아냈다. 영화를 완성하기 위해 함께 분투했던 순간이 생생하고 뭉클하게 전해진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모토키 마사히로, 후카쓰 에리, 나카무라 간자부로 그리고 기키 기린까지, 언급되는 일본 영화인들의 면면도 흥미롭다. 책에 수록된 단편소설 「유리창 너머의 하늘」은 소설가로서 그녀의 특별한 면모 또한 다시금 확인시켜 준다.
전작 『고독한 직업』에서 감독으로서 혼자 판단하고 결정하는 고독함을 이야기하던 니시카와 미와는 『료칸에서 바닷소리 들으며 시나리오를 씁니다』에서는 <아주 긴 변명>을 연출하면서 이런 태도가 변했다고 고백한다. 자의식 강한 주연 배우와 고집 센 촬영감독,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역 배우 사이에서 막다른 골목에 몰린 그녀를 젊은 연출보가 구해낸다. 연출보는 감독 옆에서 연출에 관해 조언하는 역할. 혼자서 빠르게 해결책을 내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던 저자는 연출보와 의견을 나누고 함께 결정하면서 곤경에서 빠져나온다. “혼자서 애쓰는 것만이 아름다운 일은 아니다”라고 깨달은 그녀는 동료를 믿으면서 원하는 바를 분명하게 요구하고, 더 나은 결과를 얻은 경험을 들려준다. 나아가 영화 작업이 남긴 가장 큰 선물은 “관계의 흔적”임을 깨달으며 그 흔적들을 정성껏 산문으로 적는다. <아주 긴 변명>에서 아내가 죽은 뒤 비로소 타인의 소중함을 깨닫는 주인공 사치오처럼 책에서는 관계를 대하는 저자의 변화와 성장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우리가 함께 영화를 만든 기록이 이렇게 남았다는 사실이 가슴을 내내 따스하게 데워줬고 지금은 조금 행복하다.
─197쪽



“혼자서 애쓰는 것만이 아름다운 일은 아니다”
영화가 남긴 관계의 흔적을 돌아보는 시선과 성찰


『료칸에서 바닷소리 들으며 시나리오를 씁니다』는 5부로 구성되었다. 소설, 산문, 서평, 영화평 등 내용도 다채롭다. 1부 「영화에 얽힌 x에 대해」에서는 영화와 관련한 일화들을 엮었다. 스승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따라 지가사키 해변에 있는 료칸에 합숙하면서 <아주 긴 변명>의 시나리오를 탈고했던 일, 자의식 강하지만 배려심 많은 <아주 긴 변명>의 주연 배우 모토키 마사히로와 지지고 볶으면서 영화를 만든 과정, 아역 배우들과 작업하면서 어떻게 그들을 대할지 고민하는 감독 니시카와 미와의 염려와 고민이 잘 드러난다. 영화 촬영뿐 아니라 음악 녹음, 홍보 때의 흥미로운 일화도 재미를 더한다. 2부 「<아주 긴 변명>」은 영화 <아주 긴 변명> 팸플릿에 실린 글로 착상부터 캐스팅, 촬영 과정까지 그 면면을 되짚는다. 3부 「유리창 너머의 하늘」은 열차 운전사인 한 여성을 짝사랑하는 화자가 주인공인 단편소설이다. 소설가 니시카와 미와 특유의 세밀한 내면 묘사가 돋보인다. 4부 「해피엔딩일지도 모르는」에서는 영화평과 서평을, 마지막 5부인 「누군가가 만들어주는 식사」는 일상에 관해 쓴 산문이다. 새 영화 준비차 어린아이와의 생활을 관찰하려고 아이가 있는 친구 집에서 밥을 함께 먹으면서 행복했던 기억, 애용하던 지클라세 브랜드의 단색 링노트가 생산 종료되어 절망했던 일, 카레를 해준다고 하다가 별첨 수프였던 ‘퐁 드 보’ 때문에 싸우고 헤어진 남자친구와의 일화가 유머러스하게 펼쳐진다.


남을 좌절시키는 일에 좌절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 이제 어떤 요구를 하는 것도 두렵지 않다. 상대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신용이란 존재하는 게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다.
─140~141쪽



“당당하게 현장에 있어줬으면 해”
각자의 자리에서 분투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성원


1부 「영화에 얽힌 x에 대해」에 실린 ‘x=여자들’에서 니시카와 미와는 어렸을 적 여자아이는 들어갈 수 없는 컵스카우트에 항의하다 결국 좌절한 일을 떠올린다. 그때부터 여성으로서 자신의 성별을 강하게 의식할 수밖에 없는 곳에는 가기 싫었고 “여자지만 잘할 수 있어요” 같은 말을 하는 일은 관자놀이가 떨릴 정도로 싫었다고 고백한다. 우연한 계기로 남성이 대다수인 영화계에 입문하고, 촬영 현장의 거친 남성들과 일하면서 ‘너는 정말로 이곳을 네 자리로 삼을 수 있어?’라는 베일 듯한 시선들에 괴로워하던 그녀를 보듬은 건 여성 선배들이었다. 저자는 그녀들에게 위로받고 도움받으면서 힘든 시절을 이겨냈다고 고마움과 함께 존경을 표현한다. 지금보다도 여성이 훨씬 적었던 시대의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면서도 서로에게 항상 친절하고 깍듯했던 그녀들을 보면서 여성을 처음으로 동경했다는 것. 저자는 여성 영화인들이 “남의 것이 아닌 자신의 인생을 걸치고서 틀림없이 그곳을 자기 자리로 삼고” 있다고 찬사를 보낸다. 신참이었던 자신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자상하게 일을 가르쳐준 미술팀 선배들, 20년 가까운 경력의 인정받는 베테랑이면서 짧은 대화 속에서도 언제나 상대를 웃게 만드는 세트디자이너 선배, 감독의 의도를 정확하게 간파하고 촬영하는 촬영감독 이치하시 오리에까지, 영화계에서 활약하는 그녀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영화계뿐 아니라 과거 남성이 다수였던 직업 분야에 진출한 여성들이 편견과 차별을 깨나가고 있는 지금, 자기 자리에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감독 니시카와 미와와 그녀의 동료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분투하는 사람에게 큰 용기를 전할 것이다.


페인트투성이의 헐렁한 옷이라도 남의 것이 아닌 자신의 인생을 걸치고서 그녀들은 틀림없이 그곳을 자기 자리로 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컵스카우트를 동경해서 컵스카우트에만 들어가려 했던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자를 동경했다.
─67쪽


여전히 수많은 직업군에서 여성은 소수로서, 약자로서 존재하지만 우리는 이제 직업 앞에 ‘여女’를 붙이는 것이 이상하다는 사실쯤은 안다. 물론 이런 변화는 우리가 만족할 만큼 혁명적이거나 빠르지 않다. (…) 그러나 변화는 분명 일어나고 있다. (…) ‘여자지만 잘할 수 있어’가 아니라 ‘나도 똑같이 잘할 수 있어’라고 스스로 생각할 것.
─「옮긴이의 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