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 생존자·화학자·작가

프리모 레비의 마지막 인터뷰, 마지막 흔적


아우슈비츠 수용소, 홀로코스트로 대표되는 인간의 야만을 거론할 때 누구보다 먼저 거론되는 사람은 이탈리아의 화학자이자 작가 프리모 레비다. 유대인이라는 별다른 자각 없이 살았던 그는 대학 졸업 후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부의 인종법에 저항하다 체포돼 1944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되었고, 11개월 뒤인 이듬해 1월 해방돼 아홉 달 만에 고향인 토리노로 돌아왔다. 그 뒤 도료 공장의 관리자 내지 연구자 등으로 생업을 이으며 틈틈이 자신의 체험을 글로 옮겼고, 지금도 최고의 증언 문학으로 인정받는 『이것이 인간인가』 『주기율표』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등으로 시대의 진상을 알렸다. 하지만 시대를 대표하는 거창한 일은 그의 애초 셈과는 거리가 멀었다. 극도로 내성적인 유년과 학창 시절을 지나온 그는 “이야기가 최고의 치료제”임을 누누이 말하며 누구보다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려고 글을 썼다. 그러나 당황스럽게도, 여러 권의 저서를 출간해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작가가 된 뒤에, 모든 걸 털어놓음으로써 과거를 극복했다고 믿던 67세의 나이에 그는 돌연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프리모 레비의 말』은 마음산책 ‘말 시리즈’의 열두 번째 책이다. 프리모 레비가 세상을 뜨기 두 달 전인 1987년 1월과 2월에 가진 마지막 인터뷰를 담았다. 이탈리아 문학 교수이자 평론가인 조반니 테시오가 인터뷰어로 나섰다. 그는 프리모 레비가 세상을 뜰 때까지 10여 년간 우정을 나눈 조언자로서, 프리모 레비와 공동으로 자서전을 쓰기 위해 구술을 받던 중이었다. 따라서 『프리모 레비의 말』은 1987년 1월 12일, 1월 26일, 2월 8일, 이렇게 세 차례의 인터뷰로 이루어졌지만 맥락상 한 편의 인터뷰로 볼 수 있다. 두 사람의 대화는 가족과 유년 시절의 이야기로 시작해 학창 시절, 성격, 취향, 독서 등 편안하고 애틋한 이야기를 계속하다가도 언뜻언뜻 프리모 레비 자신도 낯선 듯 털어놓는 즉흥적인 변주가 끼어들어 긴장감을 일으킨다. 자신에 관해서도 남에 관해서도 격렬한 목소리를 내지 않던 프리모 레비의 심경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두 사람은 이 책에 실린 세 번의 만남 이후에도 다시 인터뷰 약속을 잡아놓았지만 프리모 레비의 갑작스러운 자살로 성사되지 못했다. 따라서 “어떤 면에서 보면 중단된 이 세 번의 인터뷰에서 레비는 자신의 삶을 총체적으로 되돌아보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옮긴이의 말」)이다.


1986년 크리스마스이브에 나는 레비에게 자서전을 위한 자료를 함께 준비하자는 제안을 했고 우리는 곧 그것을 “승인된” 자서전으로 불렀다. 나는 느닷없이 레비에게서 어떤 균열을 감지했다. 그래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에게 작업을 제안하고픈 충동이 일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1987년 새해, 1월 12일에 작은 녹음기를 가지고 레비의 집을 방문했다. 레비는 보통 때와 다름없이 정확한 언어를 사용했지만 이따금 평상시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세 번의 만남 중 두 번째 만남을 마치고 헤어질 때, 굳은 악수에 머물고 말던 평상시의 습관과 달리 그는 나를 포옹했다. 

─14쪽, 「들어가며」 



프리모 레비를 지탱하는 기억

자신에게도 생소한 이야기


레비는 어린 시절과 아버지, 학교 선생님들과 친구들, 그리고 극도로 내성적이었던 자신의 모습을 자세히 떠올린다. 그리고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가기 전의 기억을 차분하게 이야기한다. 테시오는 레비가 어떤 기억을 떠올릴 때면 마치 그때까지 자신도 알지 못했던 사실을 발견한 듯 오래 그 기억에 머물러 있었던 반면 어떤 기억들은 꺼내기를 주저하고 이야기를 망설였다고 회상한다. 그러면서 그때까지와는 다른 고통과 죄책감을 생생하게 느끼는 듯했다고 한다.

─226~227쪽, 「옮긴이의 말」


『프리모 레비의 말』은 작가와 학자로서 10여 년간 우정을 쌓은 프리모 레비와 조반니 테시오가 공동으로 프리모 레비의 “승인된” 자서전을 만들자던 기획에서 시작한다. 1987년 1월과 2월, 두 번의 월요일과 한 번의 일요일 오후에 소형 녹음기를 사이에 두고 오간 두 사람의 편안하고 속 깊은 대화를 담았다. 인터뷰어 조반니 테시오는 자서전을 쓰기 위한 자료답게 어린 시절 부모에 관한 이야기부터 시간순으로 이끌어간다. 차분하고 간결하게, 그러나 호의와 관심으로 쏟아내는 질문 속에서 프리모 레비는 향수 어린 세월과 사람들에 대한 소소한 기억을 끄집어낸다. 큰 정은 없었으나 지적인 열의를 물려준 아버지, 그의 품성에 큰 영향을 끼친 어머니, 더없이 이탈리아적인 친척들의 사연,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결혼이 가능하던 시절, 유대인임을 자각하지 못했고 수재였으나 만년 2등이던 어린 시절, 그에게 영향을 준 선생님들과의 일화, 그의 독서와 글쓰기와 놀이, 화학에 대한 관심, 토리노의 나른한 공기 속에서 그의 숨통을 틔워준 등산. 훗날 굵직한 사건들을 겪느라 뒤로했던 작은 기억들을 털어놓으며 프리모 레비는 그의 저서들에서 언뜻 느껴지던 노스탤지어를 한껏 내비친다. 그러면서 오랫동안 잊고 살던 것들을 되찾은 듯 머뭇대고 붙잡고 음미하려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인다. 스스로 말하길 극도로 내성적인 남자로 살아온 데다, 수용소라는 한계상황을 겪고서는 더더욱 함부로 달아오를 수도 무한히 냉정할 수도 없는 사람이 되었지만, 이 마지막 인터뷰에서는 자신과 얽힌 일들을 특별한 검열 없이 터놓는다. 이후 대학 시절 맞닥뜨린 인종법과 그로 인한 학업 중단, 파시스트 정부에 대한 저항운동과 호기, 감옥살이와 아우슈비츠 이송같이 한이 돼버린 거대한 기억들을 이야기하지만, 사람을 살리는 건 늘 따뜻하고 작은 기억임을 그의 말에서 느낄 수 있다.


안이 아니라 밖에서 봐야 더 잘 보이는 일들이 있습니다. 물론 어머니와 나는 둘 다 지혜롭다는 말을 듣는데 그런 평판이 맞는지는 잘 모르지만, 둘 다 지나치게 힘에 겨운 일을 하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능력 이상의 일을 하려는 경향이 있었지요. 그런데 제가 절대 전문가가 될 것도 아니면서 완전히 무의미하고 무모하게 등산을 하는 이유는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두 분 중 누구에게 물려받은 기질인지 모르겠어요. 뿐만 아니라 아버지 어머니 모두 등산을 완전히 반대했던 기억이 납니다. 등산은 나 자신에게 주는 보상이었고, 반항이었습니다…….

─33쪽



기억 속에서 망설이고 여운을 만들다

침착함과 흔들림을 오가는 말


1987년 1월 12일의 첫 만남 이후 1월 26일과 2월 8일에 두 번을 더 만났는데 모두 오후였다. 녹음이 될 경우 레비가 말하기 꺼릴 수 있을 문제들을 더 자유롭게 이야기하려고 나는 여러 차례 녹음기를 껐다. 대화가 특별한 상황에 접어들면 레비 본인이 내게 자신의 고백은 “번역”되어야만 한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위기’에 처한 게 분명해 보이는 순간에 내게 이렇게 말했다. “처음부터 당신에게 말했지요. 번역되어야 할 고백들이 있습니다.” 

─14쪽, 「들어가며」


『프리모 레비의 말』에는 프리모 레비 인생의 전반부를 가득 채운, 태어나서 떠나본 적 없던 토리노에서의 풍요로운 추억과, 그 뒤 삶을 송두리째 바꾼 저항운동이며 수용소의 기억이 교차한다. 양극단의 일을 구술하는 중에도 프리모 레비는 그의 글쓰기가 그랬던 것처럼 격앙됨 없이 침착하지만, 두 극단 사이에는 글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섬세한 일이 많았다. 그런 일들을 이야기할 때, 예컨대 자신의 치기가 가족과 타인의 삶에 변곡점을 가져왔다는 후회와 죄책감이 들 때 프리모 레비의 구술은 멈칫하고 망설이며 여운을 만든다. 피신 중에도 아우슈비츠에 끌려간 자식을 걱정했을 어머니, 동료이자 연인으로서 포솔리 수용소에서 삶을 마감한 여인 등 말년까지 지워지지 않는 상처들이 프리모 레비의 여러 기억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이 인터뷰가 있던 1987년에 프리모 레비의 나이는 예순일곱으로, 아우슈비츠에서 풀려난 지 42년이 지난 뒤였다. 이 책의 세 번째 장인 2월 8일의 인터뷰를 나누고 두 달 뒤 그는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죄책감과 트라우마로 인한 우울증을 앓았다고 알려졌지만 세상을 뜬 근본적인 원인은 추측될 뿐이다. 『프리모 레비의 말』은 죽음에 가장 가까이 닿아 있던 때의 프리모 레비를 만나게 해준다. 


우리는 함께, 정확히 말하면 아주 흔한 방식으로 체포되었어요. 콜드주에서 우리는 어떤 임무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정치적 임무를 수행하러 함께 마을로 내려갔습니다. 밤중에 산으로 올라가지 말고 계곡의 은신처에서 자고 가라는 제안을 받았어요. 우리는 거절했습니다. 무슨 이유 때문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러고는 한밤중에 콜드주까지 올라갔고 다섯 시간 뒤에, 그 밤이 지나고 체포되었지요. 저는 자주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 게다가 그 여자는 끌려가지 않으려고 자살을 시도했어요. 동맥을 잘랐지만 곧 봉합을 해주었습니다. 그 후 그녀가 죽었기 때문에, 간단히 말해 저는 지금의 아내를 만날 때까지 그녀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제게는 정말 절망적인 상황이었어요. 사랑하는 여자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다는 게, 게다가 내가 그녀의 죽음에 한 원인이었다는 게 말입니다.

─135~13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