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이면서 그렇지 않아요, 떠나지만 늘 이곳에 남아 있어요

퓰리처상 수상 작가 줌파 라히리 5년 만의 신작 소설


자신의 언어를 빼앗긴 작가란 죽은 몸이나 마찬가지인데, 어떻게 작가가 자발적으로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소설가 김연수)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변화가 우리의 존재에 뼈대를 만든다(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라고. 모국어라 할 영어가 아닌 외국어인 이탈리아어로 직접 쓴 첫 산문집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를 통해 작가적 모험을 감행했던 소설가 줌파 라히리. 역시나 이탈리아어로 두 번째 산문집 책이 입은 옷을 펴냈고, 마침내 이탈리아어로 쓴 첫 소설을 내기에 이른다. 내가 있는 곳2013년 미국에서 출간한 장편소설 저지대이후 5년 만에 선보이는 작가의 최신작이자 다섯 번째 소설이다.

줌파 라히리는 서른셋의 나이에 장편소설이 아닌 첫 단편소설집으로, ‘미국인의 정체성이 아닌 미국에 사는 사람의 정체성 문제를 다룬 작품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하며 주목받았던 인도계 미국 작가다. 축복받은 집』 『이름 뒤에 숨은 사랑』 『그저 좋은 사람』 『저지대를 거치며 퓰리처상을 포함 오헨리 문학상, /헤밍웨이상, 프랭크오코너 국제단편소설상 등 유수의 상을 휩쓸었고 전미 베스트셀러를 기록, 평단과 독자의 신뢰와 사랑을 고루 받는 미국의 대표 작가로 자리매김하였다. 2015년에는 미국의 오바마 전 대통령으로부터 내셔널 휴머니티스 메달(National Humanities Medal)을 받기도 했다.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에서는 내면의 빈 공간을 채워주고 자아를 실현해줄 새로운 표현 수단으로서 이탈리아어를 선택하고 배우는 과정을 그녀의 삶과 연결해 진솔하게 드러냈으며, 책이 입은 옷또한 책 표지에 대한 유니크하고도 클래시컬한 사색으로 진진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그리고 내가 있는 곳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불안한 정체성과 이동하는 존재의 기억을 특유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문체로 선보인다. 경계를 넘어 자신만의 언어를 발굴하고 그를 통해 전혀 다른 세계를 오롯이 개척해가는 그녀의 단단한 발걸음을 눈으로 확인하는 기쁨이 크다.

 

나는 나이면서 그렇지 않아요, 떠나지만 늘 이곳에 남아 있어요. 이 두 문장은 휙 부는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고 나뭇잎을 떨게 하듯 잠시 내 우울한 마음을 어지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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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스쳐 지나지 않고 머물 어떤 곳이 있을까?

모어에서 외국어로, 집에서 길로, 길에서 다시 마음으로 돌아오는 이동의 기억


존재의 당혹감, 뿌리 내리기와 이질성이라는 줌파 라히리가 천착해온 주제의식은 이 소설에서 정점을 이룬다. 소설 속 주인공은 대략 40대 초반, 어느 한적한 바닷가 도시에 사는 것으로 추정된다. 직업은 교수이고 다른 사람과 관계 형성에 어려움을 느끼는 고독한 미혼 여성이다. 그녀는 움직이지 않는 것과 움직이는 것 사이에서 흔들리고, 어떤 곳과 동일화하고자 하면서도 지속적인 관계 만들기를 거부한다. 현재 살고 있고 그녀를 매료시킨 도시는 하루하루 일상을 만드는 살아 있는 배경, 중요한 대화자로 자리한다. 집 주변 보도, 공원, 다리, 광장, 서점, 길거리, 상점, 카페, 수영장, 식당, 병원 대기실, 발코니, 슈퍼마켓, 박물관, 매표소, , 남편이 빨리 죽고 나서 치료약 없는 외로움 속에 잠겨 사는 어머니를 찾아가고자 이따금 그녀를 멀리 데려가는 기차 등이 그것이다. 좀처럼 친해질 수가 없는 직장 동료들, 여러 친구들, 그녀를 위로하고 혼란케 하는 사랑의 그림자인 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계속 살아왔던 곳을 떠나게 되는 순간을 맞는다. 소설은 변해가는 일 년의 계절을 그리면서도 바다와 태양이 빛나는 날 깨어나일순간 삶의 열기로 피가 뜨거워지는 그녀의 모습을 선명히 각인한다.

 

결국 환경 곧 물리적 공간, , 벽은 아무 상관이 없다. 그곳이 맑은 하늘 아래 있는지 빗속에 있는지 여름날 맑은 물속에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기차 안인지 자동차 안인지, 해파리 떼처럼 여기저기 퍼져 있는 여러 모양의 구름들을 뚫고 날아가는 비행기 안인지는. 머물기보다 나는 늘 도착하기를, 아니면 다시 들어가기를, 아니면 떠나기를 기다리며 언제나 움직인다. 쌓다가 푸는 발밑의 작은 여행 가방, 책 한 권을 넣어둔 싸구려 손가방. 우리가 스쳐 지나지 않고 머물 어떤 곳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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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곳이 내가 사는 곳, 날 세상에 내려놓는 말들이다

줌파 라히리의 글 가운데서도 가장 투명하고 아름다운 이야기


책의 제목 내가 있는 곳은 지리적 물리적 공간일 뿐 아니라 내면의 공간이기도 하다. 46개 이야기의 장소는 물리적 공간과 마음속 공간이다. 이 공간에서 주인공은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끊임없이 사색하고 묻는다.

이 소설에는 주인공의 이름과 사는 도시가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 이름은 한계를 짓고 호명은 구체화하는 속성이 있기에, 작가는 이름을 없앰으로써 무게에서 벗어나 이야기를 열린 세계의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렇게 소설 속 주인공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된다.

소설 속 그녀는 어릴 적 부모에게서 받은 트라우마가 강하다. 외부와의 교류를 거부한 채 자신만의 누에고치에 틀어박혀 인색한 삶의 방식을 가족에게도 강요했던 아빠, 성격이 맞지 않는 아빠와 매일 다투며 딸에게 집착했던 엄마. 그 때문에 어릴 적 가족에게서 느낀 결핍과 불안은 친구 관계, 이성 관계에까지 이어졌고 여전히 그녀의 삶을 흔든다. 사랑에 있어서도 상처가 있다. 양다리를 걸쳤던 애인, 유부남과 가졌던 짧은 만남, 친구의 남편을 사랑하지만 지켜봐야만 하는 고통, 학회에서 잠깐 만나 마음으로만 품고 있는 미래의 사랑. 그녀가 한곳에 뿌리 내리는 것도 힘들어하지만 집을 떠나는 것에도 막연한 불안을 품듯, 결혼해 정착하지 못한 채 사랑에도 여전한 불안과 기대를 함께 품고 있다.

하지만 현재 자리에 남아 있으려 하면서도 그 한계를 넘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려는 열망이 공존하는 그녀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자각하게 된다. 방향을 잃고 표류하고 뿌리 뽑힌 존재라는 보편성을 인정하고 다시 이동하고 변화하려는 그녀에게서 진짜 내가 사는 곳을 본다. “개가 빌라 오솔길을 따라 날 끌고 갔듯이, 내 삶의 갑옷을 뚫고 나가도록 밀었던 뭔가를 느끼고 변화하고자 하는 것. “이 이야기는 우리가 흘려보냈던 작은 순간들을 다시 찾아내 느끼게 한다. 대부분 외롭지만, 가끔은 온기를 느끼고 가끔은 온전히 나의 것으로 누릴 수 있는 순간의 기억들을. 이 소설은 내가 읽은 줌파 라히리의 글 가운데서도 가장 투명하고 아름다운 이야기였다(소설가 최은영)라는 말에 공감하는 이유다.

 

방향 잃은, 길 잃은, 당황한, 어긋난, 표류하는, 혼란스러운, 어지러운, 허둥지둥 대는, 뿌리 뽑힌, 갈팡질팡하는.

 

이런 단어의 관계 속에 나는 다시 처했다. 바로 이곳이 내가 사는 곳, 날 세상에 내려놓는 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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