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표면과 내면을 읽는 기쁨’
국내 초역, 피츠제럴드의 내밀한 고백

 

누군가의 편지를 엿보는 일은 은밀한 재미이자 그 자체만으로 특별한 체험이다. 특히 편지의 필자가 우리가 이미 잘 아는, 나아가 조금 더 깊이 알고 싶어 하는 인물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디어 개츠비』는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 F. 스콧 피츠제럴드와 스크리브너스사의 전설적인 편집자 맥스웰 퍼킨스가 21년 동안(1919~1940년) 주고받은 편지 모음이다. 영화 <지니어스>의 주인공이기도 한 퍼킨스는 피츠제럴드와 어니스트 헤밍웨이, 토머스 울프 등 최고의 작가들을 키워낸 천재 편집자다. <지니어스>가 퍼킨스와 울프의 이야기였다면 『디어 개츠비』의 주인공은 피츠제럴드와 퍼킨스다.      
마음산책이 국내 초역으로 소개하는 『디어 개츠비』는 단순한 개별 편지의 나열이 아니다. 작가와 편집자 사이에 꾸준히 오간 긴 ‘대화’다. 이들의 육성은 영문학사를 비추는 거울이나 다름없다. 편지를 읽어나가다 보면 피츠제럴드가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성장하게 된 과정과 함께 동시대 작가들의 동향을 자연스레 접할 수 있다. 개츠비 탄생의 비화, 헤밍웨이와 평론가의 육탄전 같은 흥미진진한 문학계 뒷이야기는 읽는 재미를 더한다. 무엇보다 영미문학의 신화적 존재인 피츠제럴드의 지극히 인간적인, 내밀한 고백을 엿들을 수 있다. 

 

 

개츠비의 탄생부터 재즈 시대의 종말까지
작가와 편집자가 주고받은 21년 동안의 기록

 

편지는 총 4부로 구성됐다. 제1부 ‘친애하는 스콧, 친애하는 맥스’는 1919년 7월~1923년 11월 사이에 오간 편지로 피츠제럴드와 퍼킨스의 인연이 막 싹트기 시작한 시기다. 퍼킨스는 스크리브너스사에서 이미 두 번 거절했던 피츠제럴드의 원고 ‘낭만적 에고티스트’를 수정해 ‘낙원의 이편’이란 제목으로 출간할 것을 제의한다. 이를 계기로 피츠제럴드는 성공적인 데뷔를 하면서 문단의 주목받는 작가로 떠오른다.

 

“영화가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춰 책을 내는 게 정말 불가능할까요? 아니면 2월이라도? 책의 성공 여하에 너무나 많은 것이—물론 여자 문제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달려있습니다. 돈을 벌고 싶어서가 아니라, 책이 성공하면 삶의 새 지평이 열리는 것은 물론 저 자신을 비롯한 주변 사람 모두에게 심리적으로 큰 변화가 생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분일초를 다투는 터라 시간에 맞서 행복을 지키는 싸움에서 매분이 마치 몽둥이찜질처럼 느껴지는 그런 단계에 와 있습니다. 출간일이 판매량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이른 봄’이 언제를 가리키는지 좀 더 자세히 알려주실 수 있는지요?
—29~30쪽(피츠제럴드)

 

섬세했던 피츠제럴드는 책의 작은 부분 하나하나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표지 삽화의 인물이 주인공과 비슷하지 않다며 불평하고, 광고 문구가 매력적이지 않다며 자신이 직접 써주기도 한다. 그 와중에 끊임없이 가불假拂 요청까지 한다. 하지만 퍼킨스는 작가의 이런 까다로운 요구를 단 한 번도 허투루 듣지 않는다. 오히려 이렇게 말할 뿐이다. “우리에 관한 한 돈 걱정이 선생의 영혼을 갉아먹게 하지 마십시오.”(180쪽)
오늘날까지 전 세계 베스트셀러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위대한 개츠비』가 탄생할 수 있던 건 이런 배경에서였다. 제2부 ‘개츠비가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1924년 4월~1930년 5월)’에선 우리가 알고 있는 개츠비가 탄생하게 된 자세한 배경을 엿볼 수 있다. 퍼킨스는 개츠비의 외향적인 모습은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하되, 그의 과거는 은근하게 추측할 수 있게끔 내용을 수정하면 어떨지 제안한다. 피츠제럴드는 퍼킨스의 충고를 참고하며 『위대한 개츠비』를 보다 완벽한 원고로 다듬어나간다.
한편 피츠제럴드는 퍼킨스가 제안한 ‘위대한 개츠비’라는 제목이 걸린다며 ‘트리말키오’ ‘황금 모자를 쓴 개츠비’ ‘웨스트 에그로 가는 길’ 등 끊임없이 다른 대안을 제시한다. 이에 퍼킨스는 “낯선 부조화가 책의 느낌과 부합한다”(136쪽)며 ‘위대한 개츠비’라는 제목을 고수한다.

 

일전에 링 라드너가 찾아왔을 때 선생 소설 얘기를 했더니 단박에 “그걸 누가 발음할 수 있어요?”라고 하면서 제목을 문제 삼더군요. 인쇄상의 문제를 떠나 제목을 바꾼 건 현명한 처사였습니다. 근사한 제목이에요. 
—146쪽(퍼킨스)


놀라운 책입니다. 이제 개츠비는 매력적이고 호소력 있는, 살아 움직이는 동시에 독창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163~164쪽(퍼킨스)


T. S. 엘리엇을 얼마나 존경하는지 편집장님도 잘 알 텐데, 그런 엘리엣이—이 세상 모든 언어를 통틀어 현존하는 최고의 시인으로 생각합니다—내게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개츠비』를 세 번이나 읽었다고, 헨리 제임스 이후 미국 소설이 앞으로 내디딘 첫 발자국이었다고 말입니다.
—220쪽(피츠제럴드)

 

하지만 당시 『위대한 개츠비』는 『낙원의 이편』만큼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 9년 만에 출간한 장편소설 『밤은 부드러워』도 마찬가지였다. 제3부 ‘재즈 시대의 종말(1930년 7월~1937년 5월)’의 배경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적으로 부흥했던 미국이 1929년 대공황을 기점으로 침체기에 접어들던 때다. 부인 젤다도 작품 활동을 막 시작하던 때지만 우울증이 재발해 정신병원을 전전했다. 안팎으로 녹록하지 않았다. 제4부 ‘실패한 재기(1937년 7월~1940년 12월)’에서의 피츠제럴드는 초창기 때와 사뭇 다르다. 할리우드에서 시나리오 작업으로 근근이 돈을 벌던 그는 작가로서 잊히는 것이 두렵다며 괴로워했다.

 

『낙원』은 절판된 반면 『제5열』은 성공을 거두니(성공작이 맞지요?) 방치된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내 명성이 이렇게 사라지는 건 아니겠지요? 명성이 남아 있다면 말입니다. 여전히 난 많은 이에게 유명 인사이고, <타임>이며 <뉴요커> 등에는 여전히 내 이름이 빈번하게 오르내리는데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사라지는 것인가요.
—398쪽(피츠제럴드)


 하지만 피츠제럴드는 심장마비로 죽기 직전까지 소설 쓰기에 전념한 작가였다. 부침이 많았던 작가 옆엔 언제나 믿음직한 퍼킨스가 있었다. “삶도 술도 문학도 다 지겹다”(67쪽)며 힘겨워하는 피츠제럴드에게 퍼킨스는 말한다. “선생께서 어떤 글을 쓰시건 성공할 날이, 선생 글의 반어와 풍자가 이해될 날이 분명히 올 것”(83쪽)이라고.  

 

작가와 편집자 사이의
특별한 우정의 기록

 

두 사람이 편지를 주고받던 시기는 전후 영미문화가 제2의 르네상스를 맞이한 때이기도 하다. 편지를 읽다보면 ‘잃어버린 세대’를 대변하는 작가들은 물론 국내 독자들에게도 친숙한 여러 문인이 대거 등장한다. 피츠제럴드는 퍼킨스에게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소개해주고 링 라드너와 토머스 울프, 셔우드 앤더슨, 거트루드 스타인 등의 작품 이야기를 공유한다. 퍼킨스는 사무실에서 헤밍웨이가 자신의 부인과 바람났던 한 평론가와 육탄전을 벌인 이야기를 전하며 ‘싸움 얘기는 절대 비밀’이라는 당부를 덧붙이기도 한다.
감정 기복이 심했던 피츠제럴드의 편지엔 그의 솔직한 심정을 전하는 표현들이 자주 등장한다. 스스로를 ‘낙원의 이편에서 가장 성가신 존재’라고 말하며 편지를 끝맺기도 한다. 이성적이고 차분했던 퍼킨스도 나름의 절제 있는 위트를 구사하며 ‘젤다에게 안부를’ 전한다. 헤밍웨이 때문에 화가 났던 피츠제럴드를 점잖게 달래주기도 한다. 『디어 개츠비』는 작가와 편집자로 맺어진 두 사람의 인연이 둘도 없는 친구 사이로 발전하는 과정의 기록이다.

 

이 편지의 목적은 어니스트 헤밍웨이라는 젊은 작가를 소개하기 위함입니다. 파리에 살면서(미국인입니다) <트랜스애틀랜틱 리뷰>에 글을 발표하기도 하는 미래가 아주 밝은 친구입니다. … 곧 그를 찾아볼 생각입니다. 진짜 물건입니다.
—130쪽(피츠제럴드)


부디 제 판단에 따르지 마십시오. 중요한 부분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제가 선생을 강요했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어떤 경우이건 작가는 제 목소리를 내야 하는 까닭입니다.
—77쪽(퍼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