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젊은 문화인이 만나다


한창때를 맞은 문화인 다섯 쌍의 대화, 한국과 일본 동시 출간


어순도 단어도 엇비슷한 말을 쓰고 비행기로 날아 두 시간이면 족히 닿을 거리에 있으면서도 한없이 멀고 다른 한국과 일본. 정치에서 ‘다름’은 긴장의 다른 말이지만 문화에서라면 이해, 위로, 격려, 공생, 긍정적인 그 어떤 것도 될 수 있다. 『부디 계속해주세요』는 누구보다 열려 있고 대화의 맛을 아는 열 명의 문화인이 모여 영화, 상상력, 일러스트, 건축, 문학, 사진, 연극에 관해 다양한 생각을 나누는 책이다.
<여배우는 오늘도>로 당당히 영화감독의 명함을 단 배우 문소리 /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스태프로 시작해 이제는 일본의 독보적인 감독이 된 <아주 긴 변명>의 니시카와 미와 / 특유의 상상력과 재치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더니 일러스트레이터 자리도 탐내는 소설가 김중혁 / 똥 그림을 즐겨 그리다 일본에서 손꼽히는 일러스트레이터 겸 아트디렉터가 된 요리후지 분페이 / 건축보다 인간을 앞세우는 젠체하지 않는 건축가 안기현 / 섬세한 철학을 바탕으로 “손으로 사고”하는 건축가 고시마 유스케 / 관습에서 벗어난 맑은 필력으로 주목받는 소설가 정세랑 / 스물세 살에 최연소로 나오키상을 수상하고 일본에서 가장 주목받는 젊은 작가로 꼽히는 아사이 료 / 2차원의 평면에 현실보다 깊은 차원을 담는 사진작가 기슬기 / 일본 최고의 극작가이자 연출가로 유명한 오카다 도시키.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열 명의 문화인이 분야별로 둘씩 짝을 짓고 각자의 에피소드를 주고받으며 우정을 쌓는다. 분석이나 비판으로 얼굴 붉히지 않고도 얼마든지 서로의 사기를 북돋우는 관계. 다섯 개의 즐거운 관계 맺기가 『부디 계속해주세요』에 담겼다.
『부디 계속해주세요』는 한국국제교류재단 도쿄사무소, 일본국제교류기금 서울문화센터, 한국 문학과 문화를 일본에 꾸준히 소개해온 쿠온 출판사(Cuon, Inc.)가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을 기념해 2015년부터 3년간 진행한 대담 프로젝트 <한일 차세대 문화인 대담─함께 말하고 생각을 나누다>를 책으로 만든 것이다. 마음산책과 쿠온 출판사가 각각 한국어와 일본어로 동시 출간했다.


제 남편(장준환) 역할에는 어느 배우도 캐스팅하기가 어려운 거예요. 그 사람 느낌을 어느 누구도 내줄 수 없을 것 같아서 끝내 캐스팅을 못했어요. 잠깐 방에서 대화를 나누는 신인데. 제가 너무 캐스팅을 못하겠다고, 직접 출연해주면 안 되겠느냐고 남편한테 부탁을 했어요. 그랬더니 처음에는 자긴 절대로 연기 못한다고 펄쩍펄쩍 뛰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에 합의를 봤어요. 얼굴이 안 나오게 등하고 옆모습만 찍을 테니까 대사만 해주면 된다. 얼굴은 안 나와도 그편이 훨씬 느낌이 살 것 같았거든요. 그렇게 약속하고 남편이 현장에 왔어요. 그런데 제가 카메라 앵글을 세팅하는 사이에 보니까 남편이 옆방에 서 얼굴 분장을 다 했더라고요.(웃음) “아니, 얼굴도 안 나오는데 분장을 왜 했어요?” 하고 물었더니 “내가 감독인데, 감독 말을 어떻게 믿어요?” 이러는 거예요. 감독이 현장에서 어떻게 찍을지 어떻게 아느냐고.(웃음) 그렇게 한 컷 도와주고 돌아갔어요.
─문소리(배우, 영화감독), 25쪽



영화, 일러스트, 건축, 소설, 사진, 연극


문화인의 작업 방식과 철학


그림으로 말하자면, 한 장의 그림 속에 ‘이 느낌이 좋겠다’ 하는 청사진이 미리 있어서, 그리면서 깎아내거나 덧붙이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하나의 선을 그린 곳에 ‘아, 이거라면 이런 식으로 할 수 있지 않을까’라든지 ‘이런 식의 전개로 여기 형체가 들어가지 않을까’라는 식으로 그림이 자동 생성되어가는 겁니다. 일련의 프로세스가 하나의 비주얼이므로, 한번 만들어진 것은 깎아내기가 굉장히 어렵죠. 한번 완성했어도 내가 추구한 것과 전체 상이 다르면 한 번 더 맨 처음부터 해나갑니다. (…) 그림을 그릴 때는 당초 생각했던 것에서 싹 달라질 때 스스로 해방감이 큽니다.
─요리후지 분페이(일러스트레이터, 아트디렉터), 91-92쪽


『부디 계속해주세요』는 어느덧 자신만의 궤도에 올라 한창때를 누리는 문화인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문화와 예술은 무엇보다 실수를 누적하며 성숙한다는 경험칙을 바탕으로,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상대방의 경험과 생각을 묻고 귀담아듣는 사람들. 이들은 감출수록 군색해지는 세계에서 산다. 그래서 영업 비밀이며 경영 노하우랄 수 있는 각자의 작업 방식과 철학을 어떤 가장도 없이, 정중한 웃음과 함께 기꺼이 공유한다. 감추기보다는 드러내어 서로를 자극할 때 더 즐거운 게 예술과 문화란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부디 계속해주세요』는 그렇게 타자의 공간에 초대받아 자신의 관습을 깨고 나오는 해방의 순간들을 유쾌한 대화와 웃음으로 보여준다. 영화, 일러스트, 건축, 소설, 사진과 연극 등 분야별로 짝을 지어 나누는 이들의 대화에서, 누구보다 서로의 내막에 훤한 사람들이 터놓는 진솔한 공감과 자극을 엿볼 수 있다.


상상력이란 과연 무엇일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상상한다는 것은 자리를 넓히는 일일 것입니다. 물체들이 있어야 할 자리를 넓히고, 우리들이 서 있는 가상의 땅을 넓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지구상에는 물리적인 땅을 넓히기 위해 전쟁을 벌이는 곳들이 많습니다. 과연 지금이 21세기가 맞는지 의심스럽습니다. 한편에서는 수많은 예술가들이 보이지 않는 가상의 땅을 넓히기 위해 끊임없이 상상합니다. (…) 예술가들이 만든 상상의 공간에 고층 빌딩을 세울 수는 없지만, 부동산 투기로 돈을 벌 수는 없지만, 서로의 공간에 초대를 할 수는 있을 겁니다.
─김중혁(소설가), 75쪽



한일 문화인들의 긍정의 대화
작업과 격려, 부디 계속해주세요


쓴다는 것은 자신의 내면과 맞서는 일이에요. 취재도 많이 하고 사람과 사람이 정보를 주고받을 때 생겨나는 관계성도 있습니다만 결국에는 자기 자신과 펜, 종이 또는 컴퓨터로 된 세계라고 생각합니다. 혼자서 하는 싸움이죠. 한편으로 저는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 저 스스로를 고독으로 몰아넣는데, 역시 어딘가 견딜 수 없는 부분이 있어요. 영화를 만들면서 사람과 관계를 맺고, 타자와 같은 방향을 보며 걷는 행위를 몇 년에 한 번씩 하면서 밸런스를 잡는 면이 있네요.
─니시카와 미와(영화감독, 소설가), 34쪽


예술은 개인의 내면에 씨앗이 뿌려지지만 누군가에게 모종을 옮겨야 꽃이 피고 문화라는 문맥을 띤다. 나와 바탕이 같은 사람이 어딘가 있음을 확인할 때 더 비옥해지는 예술의 토양. 『부디 계속해주세요』는 생각하는 방식과 작업 환경이 달라도 어쩐지 서로 의지가 되는 사람, 불평도 불만족도 웃음과 재치로 눙치며 더 나은 목표를 함께 고민하는 친구 같은 사람들의 만남을 담은 책이다. 문소리와 니시카와 미와는 동갑내기 여성으로서 감독과 배우의 일을 말하며 애틋한 우정을 쌓고, 김중혁과 요리후지 분페이는 상상력을 글로 그림으로 옮겨내는 작업을 농담과 함께 이야기하면서도 진지함을 잃지 않는다. 안기현과 고시마 유스케는 건축주의 주문서와 예술 사이에서 갖는 고민과 건축가의 초심을 이야기하고, 정세랑과 아사이 료는 SNS 시대의 읽기와 소설 쓰기 사이의 고민을 들려주며, 기슬기와 오카다 도시키는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사진과 연극이라는 매체로 어떻게 현실의 겹겹을 보여주고 또 매너리즘 없이 작업을 이어나갈지 서로 영감을 나눈다.


일본에서도, 특히 인터넷에서는 어느 쪽인가 하면, 싫어하는 것에 대한 말이 많아서 세상에는 그런 감정이 더 많은 게 아닌가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좋아하는 것을 이야기할 때는 그리 큰 소리를 내지 않으니 싫어하는 것을 선언하는 소리가 크게 들릴 뿐이죠. (…) ‘공감할 수 없어서 따분했습니다’가 독서에서 가장 서글픈 감상이라고 하는데, 저는 공감할 수 없는 책을 만나면 제 윤곽이 조금 변한 기분이 들어서 기뻐요. 제가 알지 못하는 생각, 아직 도달하지 못한 무엇이 있는 것 같아서 더 읽게 되고 알고 싶어지니까요. 공감할 수 없다고 거기서 책 읽기를 그만둬버리면 자신의 형태가 일절 변하지 않은 채 어른이 돼버리지 않나 생각합니다.
─아사이 료(소설가), 209-210쪽


비슷한 생각으로 짝을 이룬 한국과 일본 문화인들의 대화가 ‘좋은 게 좋은’ 데로 치닫지 않는 건, 잘 말하는 것만큼 잘 듣고 잘 생각하고 잘 공감하는 일이 ‘문화적’인 것의 소양임을 알아서일 것이다.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고 힘을 내게 격려하되 정실비평과는 또 다른 긍정의 대화. 『부디 계속해주세요』는 메시지만큼 대화 자체의 즐거움도 중요한 사람들의 이런 ‘젊은’ 모습으로 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