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문턱에서, 파스칼 로즈가 톨스토이에게 보낸 편지 


첫 장편소설로 프랑스 최고의 문학상인 〈공쿠르상〉을 받으면서 화려하게 문단에 등장한 파스칼 로즈는 바로 그 해 어느 날, 초인종 소리를 듣고 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던 중 갑작스런 동맥 파열로 쓰러지고 만다. 세상의 주목과 찬사를 충분히 누리기도 전의 일이었다.


2000년 <모리스 주느부아 상> 수상작인 『로즈의 편지』(원제 『Lettre d’e 、re 、)는 동맥류로 인한 개두 수술과 부분적 기억 상실에 시달리며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던 파스칼 로즈가 죽음과 싸우는 자신의 내면세계를 톨스토이에게 고백하는 방식으로 담담히 써내려 나간 글이다. 자전적인 엽편 산문이면서 톨스토이에게 보내는 기나긴 편지로도 읽힐 수 있는 이 글은 파스칼 로즈의 밀도 높은 의식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톨스토이와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파스칼 로즈가 작가의 길을 걷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들이다. 그 중에서도 파스칼 로즈가 톨스토이를 고백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그에게서 ‘작가의 운명’이라는 공통의 체험을 발견해냈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투르게네프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사랑에 창녀촌이 있듯 여행에는 기차가 있다”라고 말했을 만큼, 기차역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안나 카레니나』 그리고 『크로이체 소나타』등 작품 속에서도 기차역을 파멸의 배경이며, 범죄가 폭로되는 공간으로 그려낸 바 있다. 그처럼 기차역을 혐오했던 톨스토이가 아스타포보라는 시골마을의 작은 역사에서 숨을 거둔 사실은 실로 비극적인 우연이었다.


파스칼 로즈의 운명 또한 자신이 창조해낸 작품 속 인물의 운명과 무관하지 않았다. 자신의 소설 『제로 전투기』에서 생생하게 묘사했던 “얼굴이 일그러지고 눈동자가 돌덩이처럼 굳는” 고통이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에게 고스란히 닥쳐왔던 것이다. 파스칼 로즈는 “넌 그 소설을 쓰지 말았어야 했어”라는 때늦은 후회와 함께 “글쓰기란 무해무독하지 않음”을 뼛속 깊이 체감한다. 죽음의 체험 이후 그녀에게 있어서 ‘쓴다’는 것은 ‘자신의 운명을 쓴다’는 말과 다르지 않게 되었다. 글 쓰는 자의 운명을 톡톡히 치른 파스칼 로즈는 한결 겸허해진 자세로 이렇게 다짐한다.


“진실, 오로지 진실, 체험의 도장이 찍힌 진리만을 말할 것. 그 외 다른 것을 쓰는 것을 자신에게 허용하지 말 것.” (22p에서)



‘투병’ 과정에서 ‘투명’한 삶의 에너지를 길어올리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쓰러진 파스칼 로즈에게 ‘죽음’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두려운 가능성이자 친숙한 주제로 다가왔다. 파스칼 로즈는 ‘살아 있는 상태에서 죽은 상태로 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 생에 대한 강렬한 애착을 보여주면서 ‘왜 요즘 사람들은 잠들어 있는 사이에 목숨이 다하는 것을 이상적 죽음으로 여기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녀는 죽음을 준비하는 시간을 가지기 전까지는 신 곁으로 부르지 말기를 간구하는 기도가 어느덧 사라졌음을 아쉬워한다. 자신이 살고 사랑을 나누고 분노의 비명을 질렀던 침대가 아니라 병원을 마지막 침대로 삼는 현실을 안타까워한다.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문명은 죽음의 문제에 대해 침묵한다”는 그녀의 말은 인명경시풍조와 기계적인 장례절차 등으로 무디어진 죽음에의 감수성을 일깨워준다.


죽음의 문턱에서 되돌아나온 파스칼 로즈는 열렬한 삶의 예찬자가 된다. 소시지 국수에서 비할 데 없는 왕의 관능을 느끼기도 하고, 5월의 어느 날 미지근한 물로 머리를 감겨주는 간호사의 손길에서 환희를 느끼기도 한다.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맨손으로 잡초를 뽑으면서도 시간 가는 줄 몰라 하는가 하면, 정원에 과일나무를 심고 즐거워하는 등 육체가 있기에 느낄 수 있는 생명의 감각에서 기쁨을 찾게 된다.


이토록 그녀를 삶의 의지로 이끄는 것은 『전쟁과 평화』의 여주인공 나타샤의 영혼이다. 톨스토이의 ‘생명 긍정 사상’을 체현하는 존재였다고 일컬어지는 나타샤는 천진난만하고 꾸밈없는 매력을 지닌 인물이다. 파스칼 로즈가 나타샤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삶의 의지를 다짐할 수 있는 것은 나타샤의 영혼이 가진 찬란한 힘 때문이다.


파스칼 로즈는 투병 이후 자신에게 ‘순수와 투쟁의 의무’가 생겨났다고 말한다. 그녀는 여기에 ‘나타샤 증후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녀는 뇌수술 후 머리에 플라스틱 조각을 달아야 하는 후유증을 얻었지만, 나타샤의 맑고 힘찬 에너지도 함께 얻었다. “나는 살아 있습니다”라는 간단한 문장에서도 깊은 감동이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