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추천도서


세계적인 사진작가가 일회용 카메라를 통해 보여준 사진의 진경


협소하기만 한 공간, 그곳에 불편한 자세로 꽂혀 겨우 존재하는 책들, 한참 후에 그곳을 찾아도 여전히 신간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신간 아닌 신간들(아마도 신간의 종수가 그만큼 많지 않다는 얘기가 될 수 있겠다)……. 이것이 서점 예술코너의 모습이다. 찾고자 하는 책의 대부분을 외국서적에 의존해야 하는 현실과 이 시대에 예술은 혹시 옵션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 속에서 우리의 문화적 욕구는 출구를 찾지 못한 채 욕구불만에 쌓여 있거나 눈높이를 낮추어야 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왜 그럴까? <마음산책>은 이러한 물음들을 생각하면서 일곱번째 신간인『청춘·길』을 준비하였다.


2000년 10월 6일부터 11월 12일까지 서울의 <성곡 미술관>에서는 한 의미 있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프랑스 작가가 본 동방의 빛 ― 조르주 후즈(Georges Rousse)와 베르나르 포콩(Bernard Faucon) 2인 초대 기획전>.


한 일간지는 베르나르 포콩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베르나르 포콩은 70년대 말부터 '미장센 포토'라는 새로운 방식의 사진작업을 시도한 작가. 이번 전시에서는 폐허와 부재를 의미하는 공간 속에 강렬한 인간의 삶과 존재를 환기시키고 있는 '사랑의 방(사랑의 방, 금의 방, 겨울의 방)' 시리즈 30여 점을 소개한다. 동양사상에 관심이 많은 그는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느꼈던 성스럽고 신비로운 이미지를 금빛으로 표현한 것이 특징. 또한 그는 세계 20개국의 젊은이 100명에게 일회용 사진기를 주고 원하는 사진을 찍게 해서 모은 3,000여 장의 사진 중 잘된 것을 골라 '내 젊은날의 가장 아름다운 날'이라는 제목으로 9월부터 파리에서 전시회를 갖고 있는데, 그중 일부를 이번 서울전에 특별히 선보인다.
―《스포츠 투데이》2000.10.10.


세계적인 사진작가인 베르나르 포콩은 이렇게 한국과 인사를 나누었다. 특히 포콩이 그동안 보여준 작품세계의 진수를 보여준다고 알려진 이 책 『청춘·길』을 계약하고 출간을 진행하는 동안 들려온 이 전시회 소식은, 다시 한번 포콩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주었기에 무엇보다도 반가웠다.

베르나르 포콩은 메이킹 포토(making photo)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다. 메이킹 포토를 간략하게 정의하자면 창조하는 사진, 즉 전통적인 사진기법에 회화적 요소를 추가한 사진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베르나르 포콩은 특히 인형을 사용하여 작품을 제작하는 '인형파'의 대표적인 사진가로서 80년대 초기에는 인형파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세계를 보여준 바 있다. 포콩은 1980년에 자신의 기억 속에 깊숙이 잠들어 있던 소년시대를 발굴하여 그것을 등신대의 마네킹 인형으로 재현하여 사진화한『여름 캠프』를 발표하면서 찬사를 불러모았다.


그러나 그후 포콩은 1986년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개최된 '프랑스 미술전'에서 놀라운 변신을 보여준다. 이전의 신선한 감성으로 엮은 소년시대의 추억에서 일대 전환하여 존재와 생에 대한 성찰과 짙은 상실감이 감도는 작품들을 선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른바 <사랑의 방(room of love)>이라는 제목의 텅 빈 방 연작들.

『청춘·길』 속의 사진들은 바로『여름 캠프』이후 작품세계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들이며, 자연스러움의 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사진기를 두고 떠난 여행길에서 그는 영감이 떠오르는 좋은 풍경과 맞닥뜨리면 일회용카메라를 조달하여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그와 동행한 20대 청년의 비범한 글과 만나면서『청춘·길』은 낯설고도 아름다운 한 권의 책으로 태어날 수 있었다.


보고 싶었던 전시회 몇 개를 밀린 숙제처럼 한꺼번에 돌아봤다. 그중 <성곡 미술관>에서 열린 베르나르 포콩의 전시는 거의 막을 내리기 직전에 운좋게 볼 수 있었다.
포콩의 전시 중 한 가지는 '젊은날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라는 제목의 전시였는데, 이는 전세계의 15세부터 20세까지 젊은이들에게 일회용 카메라를 나누어주고 마음대로 사진을 찍게 한 후 그것을 나라별로 모아 전시한 것이다.
놀란 것은 '어떤' 나라의 청소년들은 매우 다양한 표현법을 자유로이 구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어떤' 나라를, 문화적 전통이 깊은 나라라고 해야 할지, 시각적 표현이 세련된 나라라고 해야 할지, 예술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진 나라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조선일보》채승우 기자의 글 /
신문사 기자들이 만든 사진 전문 홈페이지〈http://photogame.pe.kr〉에서


위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청춘·길』은 세계 20개국이 주최한 축제 <내 청춘의 가장 아름다운 날>의 기획의 산물이다. 2000년 9월 파리에서 전시회를 가졌으며, 우리나라에서는 2000년 10월 <프랑스 작가가 본 동방의 빛> 전시회 기간 동안 함께 전시회를 가졌다.



매혹과 슬픔을 자아내는 사진, 평범한 젊은이의 비범한 산문


『청춘·길』은 20년 이상 터울이 지는 두 남자가 여행의 길동무가 되어 세계 곳곳을 순례하며, 자연과 인생에 대해 나눈 교감의 기록이다. 청년은 세계의 중심에서 소외되었다고 할 수 있는 곳들(미얀마의 수도 바간, 말리의 수도인 바마코, 사헬, 쿠바 등)의 풍광과 만난 내면의 인상들을 기록한다. 


섣부르기도 하고 다분히 즉물적으로 보이는 성찰들이 두서없이 나열되는 와중에, 중년의 원숙한 시선이 일회용 카메라의 눈을 빌려 포착해낸 풍광의 정점들을 향해 셔터를 누르는 순간, 영원으로 고착되어 청년의 미성숙한 내면을 감싸안는다. 더없이 길고 막막하게만 보이는 청춘의 불꽃 같은 순간들이 풍경의 빛과 그림자를 한곳에 담을 줄 아는 중년의 그윽한 시선과 겹쳐지는 것이다. 


시원하게 풀컷으로 펼쳐진 사진과 여백을 살린 글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로의 아름다움을 좇는다. 글은 사진 속으로 스며들어 풍경의 내밀한 울림을 자극하고, 사진은 언어의 공백을 채워준다. 이렇듯 사진에서 미처 보여주지 못한 것들은 글을 통해서 표현되고, 글에서 표현되지 못한 것들은 사진을 통해 완성되는데, 고요하고 적막한 기운이 감도는 사진은 청년의 뜨거운 음성과 풍경의 진수를 동시에 포착해내고 있다. 


삶의 이치를 직관해내는 원숙한 시선이 청년의 마음 속에 포개지고, 자칫 관성으로 굳어질 수 있는 중년의 내면 속으로 청년의 열정이 삼투하면서 인생의 또다른 지평을 공감각적으로 투시해내고 있는 것이다.


길이 그 위를 밟고 지나가는 자에게 잠시 동안 자신을 내어주듯, 청춘 역시 인생의 정점과 황혼을 동시에 교감하려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영원한 미덕인지도 모른다.
베르나르 포콩이 일회용 카메라를 선택한 건 아마도 이러한 삶의 오의(奧義)를 간파한 작가적인 탁월한 안목과 직감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떠한 허례나 편견으로부터도 벗어난 두 영혼의 내밀하고도 솔직한 속삭임들의 기록인『청춘·길』을 통해 우리는 문화적 욕구충족과 함께 색다른 감동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세계적인 사진작가 베르나르 포콩의 사진책을 펼쳐든 순간, 벅차오르는 감동을 억제할 수 없었다. 내게 그는 언제나 특별한 작가이며, 이 책에서 보여준 새로운 시도가 신선한 상상력과 영감을 샘솟게 하기 때문이다. 아무 가진 것 업이 여행을 떠나 즉석에서 조달한 일회용 카메라로 지역에 맞는 극적인 정경을 찍었다. 어느 지역에서든 덧없음과 영속성 사이에서, 강렬함과 연약함 사이에서 흐느끼는 삶. 진정 삶의 자유로움이 뭔지 포착하는 놀라운 그의 직관. 홀연히 사라질 듯 그 아름다운 풍경에 한없는 매혹과 슬픔을 자아내는 사진과, 그와 동행한 평범한 젊은이의 비범한 산문이 어울려 조화의 극치를 보여준 이 책은 우리를 색다른 감성의 세계로 초대한다. 영화 <아이다호>에서 청춘과 길이 주던 매혹, 생떽쥐베리의 <어린왕자>의 감동에 젖던 날처럼 나는 이 책에 온통 정신을 빼앗기고 있다. 낯선 곳에, 아무 가진 것 없이 마주하는 풍경사진 앞에, 동요하며 꿈꾸게 하는 시 같은 글을 읽는 이 순간, 청춘의 가장 아름다운 날이 되리라
― 신현림(시인·사진작가)



옮긴이 백선희


덕성여자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그르노블 제3대학에서 석·박사 과정을 마쳤다. 현재 박사논문 준비중이며 덕성여자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이오네스코의《흑과 백》, 몰리에르의《타르튀프》, 보부아르의《미국 여행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