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일상으로 인간 내면을 들여다본 누벨바그의 거장
에리크 로메르의 육성을 들을 수 있는 첫 책


장뤼크 고다르, 프랑수아 트뤼포 등과 함께 “영화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잡지”라 불리는 <카이에 뒤 시네마>의 초창기를 이끈 주역이자 누벨바그를 일군 프랑스의 작가주의 감독 에리크 로메르의 인터뷰집이 출간되었다. 국내에서도 일찍이 아트시네마, 시네마테크 등에서 특별전이나 회고전 형식으로 그의 작품이 상영되기는 했지만, 그 육성을 들을 수 있는 인터뷰집이 출간된 것은 처음이다.
에리크 로메르는 발행인인 앙드레 바쟁의 사망 이후 <카이에 뒤 시네마>의 편집장 자리를 이어받아 1957년부터 1963년까지 이 유서 깊은 영화 월간지를 이끄는 중대한 역할을 맡았는데, 그 시절 그가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택한 행로를 보면 향후 그의 작품 경향을 예견할 수 있다. 장뤼크 고다르나 프랑수아 트뤼포 같은 감독들이 칸영화제 등에 소개되며 누벨바그의 기수로 주목받던 시기, 그는 저항보다는 예술로서의 영화에 대한 관점을 피력한 글쓰기를 이어갔고 감독 데뷔는 이들 중 가장 늦게 했다. 첫 장편 극영화 <사자자리>(1962)를 시작으로 ‘도덕 이야기’ ‘희극과 격언’ ‘사계절 이야기’ 등의 연작을 연출하며 그는 비로소 타고난 이야기꾼으로서 역량을 인정받았다.
『에리크 로메르』는 그가 감독으로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할 즈음인 1971년부터 타계한 해인 2010년까지 가졌던 총 18편의 인터뷰를 엮은 책이다. 에리크 로메르의 주제와 형식, 영화제작 방식에 대한 밀도 있는 내용을 담은 이 책은 영화를 여전히 예술로 존중하는 독자들에게 한 세기를 풍미한 시네아스트의 인생을 반추할 기회를 제공한다.


“1971년 현재 젊은 세대가 전체적으로 어떤 특정한 종류의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내 관심사가 아니에요. 나는 현재 젊은이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 그리고 그들이 50세나 100세가 됐을 때 가능할 법한 모습을 보여주는 데 관심이 있어요. 그리고 영화 안의 사건들은 고대 그리스에서도 일어날 수 있었을 거예요. 상황은 그다지 많이 변하지 않았거든요. 내가 인류에 대해 관심을 갖는 부분은 변하는 것보다는 영속적이고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며, 그 점이 내가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37쪽



에리크 로메르의 “모럴리스트”적 면모 
연작 형식을 통한 변주


에리크 로메르는 관심 깊은 주제를 한 편의 영화로 끝내기보다는 ‘도덕 이야기’ ‘희극과 격언’ ‘사계절 이야기’ 등 테마마다 여러 편의 영화를 연이어 내놓았다. 그렇게 하나의 주제를 다양한 관점으로 변주했고 통찰에 깊이를 더했다. 첫 연작인 ‘도덕 이야기’ 시리즈에서 에리크 로메르는 선택의 기로에서 도덕적 딜레마에 빠진 인간의 내면을 탐구한다. 연애든 결혼이든 선택은 늘 기회비용 즉 포기를 수반하고, 어떤 도덕적 갈등과 책임과 성찰이 따른다는 점을 그는 <클레르의 무릎>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 등의 작품들에서 보여주었다. 인간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묘사하는 데 지극한 흥미를 보인다는 점에서 “모럴리스트”라 불리는 에리크 로메르는, 삼각관계에 처한 남녀 관계에서 벌어지는 유혹과 거절의 과정에 렌즈를 고정시키되, 결말 그 자체보다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도덕적·감정적 공백, 망설임을 중시한다. 사람들이 특정한 사랑을 선택하거나 그러한 선택을 정당화하는 방식, 기존의 우정이나 가족애를 새로운 관계로 협상하는 과정 등에 그는 줄곧 관심을 가졌다. 이는 프랑스 문학의 리베르티나주(무종교, 무신앙) 전통에 빚을 진 것으로, 지극히 프랑스적인 주제인 동시에 자기 성찰적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명할 만한 보편적인 주제다.
에리크 로메르는 이러한 자신의 아이디어를 연작이라는 형식을 통해 실현하는데, 일상은 하나의 관점으로는 온전히 이해될 수 없는, 이를테면 문학적 상황의 연속이라는 점을 ‘묶음 영화’로써 이야기한다. 인터뷰들에서 그는 이런 연작 실험의 노하우를 곳곳에서 들려준다. 연작의 주제가 반복될 때 따를 수 있는 지루함을 계절 등 여러 환경 변화를 잘 담은 로케이션으로 극복하고, 소규모 스태프와 내밀한 관계를 맺으며 작업의 흐름을 유지하는 그의 면면을 보면, 큰 사건이 없어도 생기가 느껴지는 그의 입체적인 영화들의 기운이 어디서 나오는지 엿볼 수 있다.


“모든 ‘도덕 이야기’ 영화에서 느낌을 너무 정확하게 규정하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거예요. 늘 다소 혼탁하고 애매하거든요. (…) 나는 내 이야기들을 진짜로 끝내지 못해요. 내가 찾아내는 엔딩들이 모두 여러 개의 반향을 지니기 때문이죠. 메아리처럼. 끝이 다시 이야기를 돌아보는 수단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에서처럼. 공이 바닥에서 튀어오르고 스토리 주변을 돎으로써 우리는 그것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되는 것이죠.”
-60쪽



문학에 대한 애정이 깃든 영화문학
소규모 제작 방식과 아마추어리즘의 열정


“어떤 경우에는 문학이 영화보다 현실을 더 잘 떠올리게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영화를 사랑해요! 그러나 문학이 아주 구체적일 수 있는 부분이 영화에서는 추상적일 수 있어요.”
-327쪽


모든 감독에게는 그의 세계를 이룬 수원水原이 존재한다. 스탠리 큐브릭에게 장르에 대한 애정이, 쿠엔틴 타란티노에게 B급 감수성이 있었다면 에리크 로메르에게 그것은 ‘문학에 대한 존중’이었다. 에리크 로메르는 1940년대에 고향인 낭시에서 문학 교사를 지낸 이력이 있고 1946년에는 질베르 코르디에라는 이름으로 소설 『엘리자베트』를 출간하기도 했는데, 이때는 영화인이 되기 전이다. 영화감독이 된 후에도 1974년 단편집 『여섯 편의 도덕 이야기』와 몇 편의 희곡을 발표했다. 『에리크 로메르』에서 누차 강조되듯이, 또 <O 후작부인> <갈루아인 페르스발>처럼 문학에 토대를 둔 역사물을 감독한 경력에서도 보이듯이, 그에게 “영화는 문학에 봉사하는 수단”(92쪽)이었다. 고전주의자로서 그는 문학 텍스트로서 시나리오의 가치에 대해 누누이 강조한다. 이러한 태도는 대사 쓰기에 대한 애정으로 이어져, 에리크 로메르는 무엇보다 심도 깊고 생생한 대사로써 지근거리에서 숨 쉬는 듯한 인물들을 담아냈다.
나아가 그는 그 인물들이 호흡하는 ‘공간’에까지 숨을 불어넣는다. “로메르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그 공간에서 같이 숨 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라는 홍상수 감독의 언급처럼 그는 미술과 건축에 대한 박학한 지식을 바탕으로 대사와 공명하는 구조화된 공간을 만드는 데 깊은 관심을 보였다.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의 경우 애초 흑백 촬영을 의도했는데, 사물마저 실제로 흑백인 것들로만 배치해 찍었다는 일화는 그가 얼마나 완벽주의자인지를 증명하는 일화다.
흥미로운 것은 에리크 로메르가 스스로를 ‘아마추어’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그가 말하는 ‘아마추어리즘’이란 열 명 안팎의 소규모 스태프와 영화를 만들며 영화제작의 모든 과정에 관여하는 그의 제작 방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대규모 예산과 인력이 동원되는 블록버스터들이 제작비 환수를 위해 필연적으로 클리셰를 활용하는 문제를 비판하며 “프로페셔널적인 것보다 아마추어적인 게 더 낫다”(231쪽)라고 단언한다. 즉 로메르에게 아마추어리즘은 현실적 문제를 넘어 미학적 선택의 문제였다. 당시의 영화제작 현실에서도 아마추어리즘은 거의 ‘전설’이 되어버렸지만, 에리크 로메르는 누벨바그 운동이 태동했을 무렵, 수단이자 목적이 돼버린 자본의 제약에서 벗어나 새 세대가 꿈꾼 진정한 영화 정신으로 마지막까지 관객들을 이끌었다. 영화의 얼굴을 바꾼 그 감독 집단에서 누벨바그의 철학적 뿌리에 가장 가까이 머물렀던 것은 에리크 로메르였음을 이 책은 거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증명한다.


“아마추어주의의 덕목 중 하나가 바로 거기(이미지의 단순함)에 있어요. 관객들 각자가 스스로 자신만의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것과 거의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내 세계로 그들을 초청하는 내 방식이에요. (…) 나는 아마추어주의를 주장하는 데 자긍심을 느끼며 그 결과에 책임을 집니다.”
-243~24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