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첫 소개! '작가들이 칭송하는 완벽한 스타일리스트, 설터!'
“제임스 설터는 너무 늦게 우리 독자에게 왔다!”―소설가 하성란


20세기 미국 문단에 한 획을 그은 소설가이자, 동료 작가들이 완벽한 스타일리스트로 칭송하는 제임스 설터의 작품이 한국에 처음 소개된다. 설터는 헤밍웨이로 대표되는 간결한 남성적 문체를 구사하는 작가로, 수전 손택은 그를 가리켜 “독서의 강렬한 즐거움을 아는 독자에게 특히 어울리는 작가”라고 평한 바 있다. 펭귄 클래식에 생존 작가로는 드물게 4권의 책이 포함되어 있으며, 랜덤하우스의 명편집자 고故 조지프 폭스는 “편집한 책 중에 다음 세대까지 오래 남을 책을 들라”는 질문에 설터의 『가벼운 나날들Light Years』을 꼽기도 했다. 제임스 설터는 1989년 단편소설집 『황혼Dusk and Other Stories』으로 펜/포크너상을 수상했으며, 소설뿐 아니라 시나리오 집필에도 몰두해 영화 <다운힐 레이서Downhill Racer>(1969)와 <어포인먼트Appointment>(1969)를 작업하기도 했다.


마음산책이 설터의 첫 책으로 선보이는 『어젯밤』에는 ‘이 시대 문단 최고의 단편’(<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으로 꼽히는 표제작「어젯밤」을 비롯하여 명품 단편 10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 작품들은 하나같이 치정과 배신으로 폭발 직전인 한순간을 묘파한다. 특히 설터는 생각지도 못하게 엉망이 되어버린 순간을 포착하는 데 가히 천재적이며, 거기에 뒤따르는 혼란과 상실을 특유의 군더더기 없는 문장으로 드러낸다.


그 집뿐이었다. 나머지는 그리 강렬하지 않았다. 삶을 꼭 닮은 장황한 소설 같았다.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다 어느 날 아침 돌연 끝나버리는. 핏자국을 남기고.
―169쪽, 「어젯밤」에서



인생을 망치기도 하는 열정과 욕망의 정체
어둡고 섹시하다!


설터는 이 단편집에서 주로 미국 중산층 연인, 부부의 일상을 배경으로 그들의 성적 욕망과 탐닉, 그리고 그 이후의 삶에 칼날을 들이댄다. 그 사건들은 때로 생을 지배하는 중요한 기억이기도 하지만 대개 뼈저린 후회로 남는다. 이를테면 「나의 주인, 당신」에서는 예술적 광기에 사로잡힌 시인에게 빠져든 여주인공이 일탈을 통해 새로운 존재로 변화하지만,「플라자 호텔」에서 남주인공은 옛 연인과 재회한 후 허망함을 느낄 뿐이다. 헤어진 두 남녀의 대화가 기묘한 긴장감 속에 이어지는 「방콕」에서도 이들의 사랑은 강렬한 추억일 뿐이고 현재의 삶은 각자의 몫이다. 젊고 아름다운 정부에게 반한 남자의 이야기 「귀고리」에서도 관계의 말로는 씁쓸하다. 그럼에도 소설 속 모든 인물은 끊임없이 무모한 열정에 사로잡히며 상대에게 매혹당한다. 이 불가사의한 감정의 정체는 무엇일까? 작가는 「혜성」에서 여주인공의 입을 통해 질문을 던진다. ‘한 사람에게 미치는 것이 결국 한 벌의 코트를 욕망하는 것과 같은가?’라는.


나도 비슷한 일이 있었어요. 하루는 버그도프 백화점 앞을 지나는데 쇼윈도에 맘에 드는 초록색 코트가 걸려 있었어요. 그래서 들어가서 그 코트를 샀어요. 그런데 며칠 지나서 다른 곳에서 처음 코트보다 더 좋은 걸 본 거예요. 그래서 그것도 샀어요. 나중에 옷장 안엔 초록색 코트가 네 벌이나 걸려 있게 됐죠. 욕망을 자제할 수 없어 그런 거예요.
―21쪽, 「혜성」에서


모두가 각자의 욕망에 충실한 탓일까. 제임스 설터의 단편들은 대개 배신으로 점철된 놀라운 결말을 담고 있다. 그의 인물들은 넘어지고 빠져들고 죄로 유혹하고 자신들도 어느 순간 죄를 짓는다. 「포기」에서 아내의 생일날 밝혀지는 남편의 배신―한집에 사는 친구이자 시인인 데스와의 사랑―은 충격적이다. 가장 극적인 배신을 보여주는 작품은 「어젯밤」이다. 병든 아내를 안락사시킨 뒤 남편이 벌이는 행각, 이후 스릴러 못지않은 반전……. 이처럼 설터가 그리는 연애와 결혼생활의 일면은 잔인하고 불안정하다. 자기애에 빠진 인물들의 모습은 이기적이며, 관계는 오싹하게 어긋나기 마련이다.


그는 식탁 위로 몸을 구부려 턱을 손에 괴었다. 누군가를 안다고 생각하겠지만, 저녁을 함께 먹고 카드를 몇 번 쳤다고 생각하겠지만 당신은 실제로 아무것도 모른다. 언제나 놀라게 된다. 당신은 아무것도 모른다.
―19쪽, 「혜성」에서



압축된 문장, 정밀한 비유로 가득한 글
“잎맥 같은 글을 쓰고 싶다”


설터의 문장은 간결하다. 동시에 옮긴이가 지적한 것처럼 ‘번역이 불가능할 정도로 압축되고 정밀한 문장’이기도 하다. 설터는 평범한 사건과 대화로 스케치하듯 삶을 보여주지만, 그 이야기에는 사건의 본질을 꿰뚫는 결정체가 담겨 있다. 언젠가 설터와 함께 영화 작업을 했던 로버트 레드포드는 설터의 스타일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그때 설터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어요. 나뭇잎을 들어 올려 햇빛에 비추어 보면 잎맥이 보이는데, 다른 건 다 버리고 그 잎맥 같은 글을 쓰고 싶다고.” 잎맥 같은 글을 쓰는 작가, 설터. 그 시선이 훑고 간 자리에 남는 것은 사랑, 정욕, 두려움, 슬픔, 후회 등 갖가지 감정이 뒤엉킨 우리의 맨얼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