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일곱 권을 ‘읽어치운’ 독서가 요네하라 마리
평생 동안 ‘먹어치운’ 음식을 말하다!


저널리스트 고종석은 ‘나는 요네하라 마리의 충성스러운 독자다. 생전에 한번 만나봤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숭배자이기도 하다’라며 그에 대한 애정을 표한 적이 있다. 대체 요네하라 마리는 어떤 사람이기에 고종석이 ‘숭배자’임을 자처하는 것일까? 그의 이력은 이렇다. <요미우리 문학상> 등 유수의 문학상을 수상한 에세이스트, 러시아 주요인사의 방일 때마다 수행 통역한 일류 동시통역사, 하루에 7권씩 읽어치운 책들을 기록한 서평집 『대단한 책』의 저자, 스탈린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올가의 반어법』을 쓴 소설가……. 게다가 어느 한 가지 정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 방대한 이력에 독특함을 더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어린 시절의 경험이다. 요네하라 마리는 1960년대, 공산당 간부였던 아버지를 따라 프라하로 이주해 외국인 친구가 대다수인 국제학교를 다니면서 이異문화를 접했고,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문화적 차이를 깊이 있게 통찰한 글을 써왔다(이 내용은 『프라하의 소녀시대』 『마녀의 한 다스』 등에서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 책 『미식견문록』의 출간으로 저자는 ‘미식 에세이스트’라는 이력을 하나 더 보태게 되었다.


그는 ‘맛있는 것이라면 정신을 못 차리’고, ‘먹기 위해 사는’ 사람으로 대식가 가문에서 엄청난 먹성을 물려받은 ‘냠냠공주’(저자의 별명)다. 또 어린 시절부터 세계를 드나들었기에 개구리, 뱀, 곰의 발, 사슴 코 등등 먹어본 음식의 폭 또한 다양해 미식 에세이스트로서는 훌륭한 조건을 갖춘 셈이다.


『미식견문록』은 음식에 특별한 애정을 가진 저자가, 자신의 경험은 물론 음식에 관한 동서고금의 얘깃거리와 속담, 문화사까지 아우른 37편의 음식론이다. 책 곳곳에 스며든 저자 특유의 농담에 쿡쿡 웃음을 터트리다가도, 이 대단한 독서가가 꼼꼼히 안내하는 지식에 마음이 든든해진다. ‘읽어치우기’에 탐닉하던 지식여행자가 이번에는 ‘먹어치우기’를 주제로 인문학적인 지식을 곁들여 유머러스하게 풀어낸 것이다.



모든 음식은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음식 문화의 단면을 파헤치는 지적인 즐거움


음식은 역사와 분리해 생각할 수 없으며, 어느 음식에나 그에 관한 문화적 배경―식습관, 새로운 식품의 등장, 음식을 둘러싼 종교적 금기나 계급 차이, 문명 간 교류 등―이 들어 있다. 『미식견문록』 역시 이러한 음식사를 조목조목 소개한다. 코스로 나오는 프랑스 요리의 서비스 방식이 사실은 러시아에 뿌리를 두고 있다거나, 19세기만 하더라도 감자가 ‘악마의 열매’라는 종교적 믿음 탓에 널리 보급되지 못했다는 언급이 대표적이다.


눈여겨볼 것은 요네하라 마리가 이 내용들을 추적하는 과정이다. 마리 여사에게 음식과 음식에 대한 공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예를 들어 어린 시절 먹어본 ‘할바’라는 러시아의 과자 맛을 몇십 년째 잊지 못해 ‘할바’와 비슷해 보이는 우즈베키스탄의 과자 ‘할바인타르’, 루마니아의 ‘Loukoum’, 스페인의 폴보론 등의 조리법과 어원을 추적하여 ‘할바의 모든 것’을 밝혀내는 식이다.(저자는 이 과정 끝에 이것들이 모두 ‘유라시아 대륙에서 유목민이나 상인들의 교류에 의해 전파된 혈연관계에 있는 음식들’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이렇듯 음식과 식생활을 살피는 과정에서 어원 조사뿐 아니라 관련 책자, 백과사전, 신문 기사, 인터넷 자료 등 찾아낼 수 있는 갖가지 자료를 풍부히 총망라했다. 자료만 총망라한 것이 아니다. 러일 동시통역사라는 직업상 러시아와 일본은 기본이고, 알바니아 등 유라시아 대륙까지 그가 가본 곳 어디에서나 음식에 관한 언급을 빠뜨리지 않는다.


알다시피 양배추 밭에서 아기가 태어난다는 이야기는 따오기가 아기를 물어온다는 이야기와 함께 유럽에서 전해 내려오는 2대 아기 점지 전설이다. ‘양배추 밭’ 이야기는 중세 스코틀랜드가 기원이라고 백과사전에 나와 있다. 그 근거는 11월의 할로윈 축제 전야에 미혼 남녀들이 수확 후의 양배추 밭에 가서 눈을 가리고 닥치는 대로 양배추 뿌리를 뽑아와 사랑점을 쳐보거나, 양배추 심지를 잘라와 배우자를 고르는 점을 쳐보는 전통행사가 있다는 데서 그 근거를 찾는다. 예를 들면 뿌리점은 ‘뿌리에 흙이 묻어 있으면 반드시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싱거운 것이다(대체 흙이 묻지 않은 뿌리가 어디 있단 말인가). (…) 이렇듯 양배추는 세계에서 재배되어 식용되고 있는 채소요, 양배추 밭은 친근한 존재다. 둘째로, 양배추의 형태가 몇 겹이나 포대기를 싼 아기 모습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은 아닐까. 사실 고대 로마 시대에 양배추를 품종개량하여, 지금처럼 공 모양의 품종이 생겼다. 이것이 ‘양배추 밭 아기’ 전설의 설득력에 큰 힘을 실어준 것이 아닐까 싶다.
-159쪽에서


또 저자는 어린 시절 읽은 동화책 가운데 음식에 관한 대목만은 비상히 기억하는 재주가 있는데, 이 음식들을 먹어보고는 ‘이야기 속 음식’과 ‘실제 음식’을 비교·분석하는 대목에서는 웃음을 참을 수 없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에 나오는 염소젖을 먹어본 뒤 강렬한 암내에 실망했다는 이야기며, 일본 민담 『모모타로의 기장경단』에 나오는 기장경단의 밍밍한 맛에 낙심했다는 이야기 등은 저자의 왕성한 실험정신을 보여주는 사례다.


‘애걔. 이게 뭐야. 이까짓 경단 하나에 도깨비 섬까지 따라갔단 말이야? 목숨을 걸고?’
마음속으로 투정하면서도 상자 속 기장경단은 위주머니 속으로 홀랑 다 들어갔다.
그로부터 20년 후, 나는 농산물 수출입에 관한 국제회의의 동시통역을 하러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 가게 되었다. 회의의 틈을 타서 양돈장을 시찰할 때였다. 마침 먹이를 줄 시각이라 토실토실 살찐 돼지들이 무서운 속도로 먹어치우고 있다.
“맛있어 보이네요. 먹이는 뭐죠?”
답은 ‘hog millet’, 즉 기장이다. 그래. 원숭이나 개, 꿩에게는 더없이 매력 있는 음식인지도 모르지, 라는 생각이 그때 들었다.
-162쪽에서



가장 개인적인 경험에서 시작한 음식 아라비안나이트
식생활이라는 현미경으로 관찰한 삶의 서사, 시대의 풍경


『미식견문록』에서 요네하라 마리는 음식이라는 친근한 소재에 발을 담그고, 자신의 가장 개인적인 경험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낸다. 미식가였던 삼촌의 마지막 유언은 저녁 메뉴에 관한 것이었다거나, 라식 수술 뒤 일시적 실명 상태가 된 일본 환자에게 우메보시 도시락을 먹여 눈을 밝혀주었다거나…… 음식에 관한 사연들은 끊임없이 솟아난다. 이 과정에서 저자가 전하고 싶어하는 것은 에피소드를 넘어, 음식 한 그릇에 담긴 삶의 서사와 시대의 풍경이다. 요네하라 마리는 사람의 정치 성향에 따라 미지의 음식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는 것을 간파하며, 보드카가 러시아 문화에 가져온 변화를 관찰한다. 음식이야말로 사람과 시대를 이해하는 가장 재미있는 수단이 될 수 있음을 이 매력적인 저자는 유쾌하게 증명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