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네하라 마리의 개와 고양이와 함께한 시간들
-인간 수컷 없이도 행복하다!


<요미우리 문학상> <고단샤 에세이상> 등 유수의 문학상을 수상하며 에세이스트로 명성을 떨친 러·일 동시통역사 요네하라 마리의 새로운 산문집이 출간됐다. 『미녀냐 추녀냐』 『대단한 책』 등 저자 특유의 명민한 분석력이 돋보였던 기존의 저서들과는 달리, 『인간 수컷은 필요 없어』에서는 마리 여사의 개, 고양이와 함께한 시간들이 유쾌발랄하게 펼쳐진다. 다시는 동물 따위 키우지 않겠다고 다짐 또 다짐한 저자가 어쩌다 길고양이 두 마리를 입양하면서, 점점 개판 고양이판이 되어가는 특별한 사연들을 담은 것. 소설가 김영하의 표현처럼 ‘부르면 오는’ 개와 ‘메시지만 받고 오고 싶을 때만 오는’ 고양이, 그리고 인간까지 서로 다른 세 종족이 한 공동체를 이뤄가는 좌충우돌기인 셈이다. 지적인 유머는 물론이요, 스토리텔러로서의 필력도 여지없이 발휘된 이 책은 인간과 동물 간의 ‘조건 없는 사랑’과 동시에, 작가가 ‘동물을 통해 인간을 되돌아보는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물론 이 책의 가장 특별한 점은 이 가족에 인간 수컷이 없으며(저자는 평생 독신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행복했음을 보여준다는 점일 테지만.



개판 고양이판!
녀석들과 함께한 별난 일상과 능청 어린 수다


마리 여사의 식구들의 수는 언제 어떻게 늘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도카이무라의 유기견이었던 겐, 고텐바 동시통역회의장 앞 길고양이였던 무리와 도리, 모스크바에서 온 페르시안 고양이 자매 타냐와 소냐, 소냐의 자식 시마와 료마, 실종된 겐을 찾다가 얼결에 함께 살게 된 노라까지.


출장지 인근의 버려진 개와 고양이들을 입양하다 보니 어느 새 이들은 대가족을 이루게 되었고, 덕분에 마리 여사는 이들을 건사하느라 바람 잘 날이 없다. 그녀는 우유를 먹고 탈 난 고양이들을 안고 한밤중에 빗길을 질주하고, 온갖 복잡한 절차를 거쳐 고양이 해외 입양도 불사하며, 택시를 대절해 녀석들과 함께 휴가를 떠나고야 만다. 얼마 전 충북 한 호숫가 펜션에 놀러갔던 황인숙 시인도 그곳에서 뛰어놀 고양이들 생각만 가득했다고 하니, 가히 애묘족들이 공감할 만한 에피소드다.


그렇다고 사람만 개와 고양이를 걱정하는 게 아니다. 개와 고양이들도 저자의 사랑에 답한다. 나무 타기를 마스터한 도리는 마리 여사가 나타나면 늘 나무에서 베란다로 폴짝 뛰어내려 기쁨을 선사하고, 아침 산책을 함께하는 겐은 서글서글한 미소로 하루치 엔돌핀이 되어준다. 이쯤에서 저자는 능청스레 한 편의 SF소설 같은 고양이 ‘지구정복설’을 제기한다. 「지구정복의 첨병들」은 마리 여사가 고양이의 매력을 예찬하는 가장 유머러스한 방식이다.


이렇게 해서 페리네 혹성인들은 지구인들이 무조건적으로 매료되고 아무런 이유 없이 호감을 품게 되는 모습, 행동과 음성, 성격 등을 연구했다. 그리고 이끌어낸 결론이 바로 고양이였다.


“고양이로 변신해서 지구인들의 마음을 빼앗은 뒤 지구를 탈취하자.”
……페리네 혹성의 의학기술은 지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달되어 있었기에, 그들이 고도의 지능과 복잡한 정서를 그대로 유지한 채 고양이로 변신하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다.
83쪽



동물과 관계 맺기에 대한 지침서
혹은 동물생태 보고서


동물을 키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물들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해도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난감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마리 여사에게도 얌전했던 겐이 갑자기 짖거나, 겐의 입양에 반항한 무리와 도리가 가출하는 등 문제적인 상황이 줄줄이 이어진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끊임없이 책을 찾아보고, 수의사와 상담을 하고, 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여러 가지 방법을 실험해본다. 그렇게 알게 된 동물생태학적 지식들―겐이 짖는 것은 이제 완전히 마리 여사를 주인으로 여기기 때문이라거나, 개는 밥 줄 때보다 산책을 더 좋아한다는 것 등―은 이 책을 단순한 에세이를 넘어 동물생태 보고서로 자리매김하게 한다. 또한 훈련시키거나 가르치기보다 동물들의 본성을 최대한 거스르지 않으려 노력하며, 인간중심적인 시각을 비판하는 부분은 마리 여사 박애정신의 궁극이다.


왜, 무엇 때문에 이렇게 잔인한 짓을 하면서까지 개를 키우는 걸까. 동물의 ‘동’은 한자로 ‘움직일 동動’자를 쓰지 않는가. 움직인다는 일 자체가 가장 당연한 동물의 존재형태다.
213쪽


무엇보다 러·일 동시통역사인 저자답게 책 곳곳에 소개된 통역 관련 에피소드도 읽는 재미를 더한다. 러시아어 통역뿐 아니라 고양이와 개 언어의 통역 또한 능통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