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만사(책을 만드는 사람들) 2008년 올해의 도서 선정

조선일보사 ‘거실을 서재로’ 2007년 11월 선정도서


살아남기 위해 책을 펴 들었다가,


『대단한 책』의 저자 요네하라 마리는 누구인가. 공산주의자 아버지를 따라 체코 프라하에 체류하며 각국의 아이들과 한데 어울려 1959년에서 1964년(9살~14살)까지 소비에트 학교를 다니고, 일본으로 귀국한 후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공산당에 가입하고, 러시아어와 문학을 전공하여, 유명한 일본어-러시아어 동시통역사로 동구권의 사회주의 국가를 제집 드나들듯 한 이다. 어린 시절 소비에트 학교의 모든 수업이 러시아어로 진행되었기에 자의든 타의든 러시아어를 배웠고, 그걸로 평생의 직업을 삼은 셈이다. 그런 저자였지만 이국에서 공부하던 시절의 초기에는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아 심각한 언어 쇼크에 시달린다. 그럼에도 저자는 어렵사리 익힌 러시아어 실력을 키워 이역만리 공포의 소비에트 학교에서 아주 훌륭하게 살아남는다. 그 비법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어학원이나 가정교사를 통한 외국어 학습이 아닌, 책을 통한 자력갱생이었다. 러시아어로 된 문학작품을 읽으며 꾸준히 어휘를 늘려 나갔던 것이다. 1964년에 일본으로 돌아온 저자는, 이번에는 두 번째 언어 쇼크를 겪는다. 외국에 머문 동안 동년배와 단절되어 어휘가 늘지 않아 일본어가 달렸던 것이다. 그때도 저자는 문학작품을 독파해 가며 정규 교육을 따라잡는다. 그 후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입시지옥에서 견디느라 러시아어 공부는 뒷전이었을 텐데, 어떻게 대학에서 다시 러시아어와 문학을 전공할 생각을 했을까. 비법은 역시 책이다. “일소日蘇도서관에서 책 네 권을 빌려 1주일 동안 읽고 반납하고 다시 네 권을 빌리고 때때로 간다에서 새로 나온 책을 사기도 하는 생활을 이어 갔다. 그러고는 중학교 2학년 때 귀국해서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달리 러시아어 공부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러시아어 수준을 유지하고 향상시킬 수 있었다고 자부한다.”(「가장 쉬운 외국어 학습법」, 522~523쪽)



책과 더불어 산 호모비블리오쿠스homo-bibliocus의,


“새로운 언어를 익히기 위해서도, 그리고 유지하기 위해서도 독서는 가장 고통이 적은, 더구나 가장 효과적인 수단”(「가장 쉬운 외국어 학습법」, 524쪽)이라고 강조한 저자는 자신의 고백대로 일면 말을 더 잘하려고 책을 찾은 사람이다. 한데 이렇게 책을 만났던 저자가 그 책을, 일생을 적극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데 절실한 동지이며 선생님이자 반려자로 삼는다. 자신이 처한 문제 상황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할 때는 물론이거니와 일반적인 궁금증이나 본인의 주관심사인 일본 사회와 러시아 상황을 비롯한 국제 정세에 대한 호기심에 생겼을 때에도 저자는 가장 먼저 책을 집어 든다. 이사 직후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수컷 고양이의 사진집 『치비의 사랑 찾기チビのお見合い』를 읽고, 본인과 똑같이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고양이들을 위해서는 『고양이에게 정신과 전문의가 필요할까?Do cats need shrinks?』를 찾기 위해 산더미 같은 책 속을 헤매다 길을 잃기도 한다. 심지어는 눈이 빡빡할 때 읽기만 하면 흘러넘치는 눈물을 주체할 길이 없게 하기에 안약 대신 펼쳐 드는 책도 있다.


먹는 속도, 걷는 속도, 책을 읽는 속도는 꽤 빠른 편이다. 먹기와 걷기의 경우, 자주 빈축을 사기도 한다. “다른 사람과 함께 걷거나 먹을 때에는 상대방과 속도를 맞추어 시공간을 공유한다는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잔소리를 들었다. 그런 반면 독서의 경우에는 아무리 빨리 읽어도 옆에서 아무도 참견하지 않는다. 그래서 대학 입시 때의 암기 지옥에서 해방되었을 때부터 책을 읽는 속도는 재미가 붙을 정도로 빨라져, 그 후 20년 동안 하루 평균 일곱 권을 읽고 있다.(「소설 없이 살 수 있을까」, 357쪽)


책으로 사는 ‘독서 생활인’ 요네하라 마리는 다독하는 데다가 20분 만에 무려 몇 백 쪽의 책을 뚝딱 읽어 낼 정도로 속독에 능하다. 더구나 호기심이 너무 왕성하고 집요한 탓에, 단박에 단 한 권의 책에만 의지하여 쉽게 결론을 내어 버리는 타입조차 못 된다. 이 책에서 내내 그러하듯이 인생 말기에 이르러 난소암이라는 절체절명의 과제를 만났을 때에도 저자의 오랜 버릇은 어김없이 되풀이된다.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만큼 달관하지 못한” 저자는 검사와 치료를 받느라 병원을 전전하면서도 무려 여남은 권이나 되는 암 치료 서적을 독파하며 자신의 몸으로 암 치료 책을 직접 검증한다. “내게는 역효과만 있었다”라거나 “여러 저서에서 좋은 부분만을 뽑아(일부는 완전히 표절이다) 짜깁기를 한 책”이라는 평가조차 빼먹지 않는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자신이 좋아하던 러시아·일본 문학, 논픽션류, 어학·사전류, 국제 정치에 관계되는 책, 개·고양이 서적 등에 대해서는 지면을 할애하지 못하고 있으나, 죽음 앞에서도 요네하라 마리의 사유의 불꽃은 활활 타오른다.



죽기 전까지 읽고 사유한 책에 대한 기록 - 390권을 다룬 186편의 글


『대단한 책』은 요네하라 마리가 2001년부터 2006년까지 《주간분슌週刊文春》에 연재한 「독서일기」와 1995년부터 2005년까지 각 신문과 잡지에 기고한 장단편의 「서평」으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는 총 390권의 책을 다루고 있는데, 「독서일기」에는 일본의 『새로운 역사 교과서』 파동, 2002년 한일 월드컵, 이라크 전쟁 등 당시의 이슈에 대한 시평을 곁들인 47편의 글이, 「서평」에 139편의 글이 실렸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무려 20년간 하루에 7권씩 읽었다고 하니, 저자가 읽은 총량에 비하면 책 390권과 글 186편은 미미한 양이라 하겠다.


특히 「독서일기」에서 마지막 독서일기 「내 몸으로 암 치료 책을 직접 검증하다 3」은 2006년 5월 18일 《주간분슌》에 실렸던 것이다. 그날로부터 열흘도 채 지나지 않은 5월 25일에 저자는 세상을 떠났고 죽기 직전까지 손에서 놓지 않은 그 책들에 대한 기록은 이렇게 세상에 남았다. “마지막까지 감상에 빠지지 않고 사색을 계속한 강인한 정신이, 또한 이 책에 그대로 녹아”(해설 「불꽃 튀는 치열한 사색」, 664쪽) 있는 이 저작의 원제는 『완전히 제압당해 재기불능으로 만들 것 같은 대단한 책打ちのめされるようなすごい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