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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를 경험한 일본 작가, 요네하라 마리가 되살려낸 스탈린 시대의 기억
―문제적인 역사소설


<요미우리 문학상> <고단샤 에세이상> 등 유수의 문학상을 수상하며 에세이스트로 명성을 떨친 러·일 동시통역사 요네하라 마리의 소설이 출간됐다. 일본의 대표적 여성지식인인 마리는 1960년대 공산당 간부였던 아버지를 따라 프라하에 거주했던 어린 시절의 독특한 경험을 바탕으로 에세이와 소설을 집필해왔다. 또 2005년 건강악화로 은퇴하기 전까지 러시아 주요인사가 방일할 때마다 수행 통역하는 일류 동시통역사로 활약하면서 국제정세와 각국의 문화 차이에 관해 새로운 시각이 담긴 글을 선보이기도 했다. 국내에도 이미, 프라하의 소비에트 학교 재학시절을 애틋하게 그린 『프라하의 소녀시대』와 다독가로서의 면모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단한 책』 등으로 많은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다.


『올가의 반어법』 역시 요네하라 마리의 자전적 경험을 소재 삼아, 스탈린시대를 무대로 가혹한 삶을 산 무용천재 올가의 인생을 미스터리 형식으로 구성한 추리소설이다. 추리소설의 틀을 가져왔지만 주인공 올가는 프라하 소비에트 학교의 실존했던 인물이자 스탈린시대를 견딘 자들에 대한 알레고리이기에 문제적인 역사소설이기도 하다. ‘여성 도스토예프스키의 탄생’(가에야마 구니오龜山郁夫, 도쿄외국어대학 학장)이라는 극찬을 받은 이 소설은 2003년 제13회 <분카무라 두마고상文村ドゥマゴ文學賞>을 수상하였다.



무용천재 올가의 베일에 싸인 인생, 그녀의 진실은 무엇인가


1960년, 체코의 프라하 소비에트 학교에 들어간 ‘시마’는 무용교사 올가 모리소브나에게 매료된다. 나이는 들었지만 무용천재에, 자신만의 독특한 반어법을 자랑하는 올가. 탁한 목소리로 ‘거세 돼지는 암컷 돼지에 올라탄 다음 생각한다’(쓸데없는 짓을 한다는 뜻), ‘도대체 언제쯤이면 알겠니! 자기 불알보다 높이는 날 수 없는 법이야!’ 등 냉소적인 유머와 독설로 가득한 반어법으로, 아이들을 강하게 키우는 그녀의 솜씨는 천하일품이다. 하지만 늘 뭔가를 감추고 있는 듯한 올가는 존재 자체로 거대한 수수께끼다.


소비에트 학교를 졸업한 30여 년 뒤, 러·일 동시통역사가 된 시마는 마침내 모스크바로 날아가 올가의 반생애를 거슬러 올라간다. 대담한 반어법을 구사했지만 유독 ‘알제리’라는 말에는 창백해지곤 했던 올가. 그녀는 놀랍게도 스탈린 치하 ‘알제리’ 수용소(북아프리카의 구 프랑스 식민지와는 무관하다)의 생존자였고, 기억의 문이 하나씩 열리며 쏟아져 나오는 잔혹한 삶의 실상은 그야말로 강렬하다. 『올가의 반어법』은 스탈린 치하에서 숙청, 가족과의 생이별, 혹독한 추위, 굶주림 등 무자비한 시대적 폭력에 시달렸던 자들에 대한 애정과, 지배 권력에 대한 분노를 생생히 그리고 있다. 또한 곤핍한 삶 가운데에서도 서로를 다독이는 끈질긴 생명력과 인간의 존엄함을 이어가는 인물들은 독자들을 압도한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여자들이 낮 동안의 노동으로 녹초가 된 몸을 딱딱한 침대에 눕히는 어두컴컴한 건물 안에서 부드러운 알토 소리가 들렸다.……그 뒤로는 매일 밤, 모두 기억 속에 있는 책을 생각해내고 소리를 내며 이렇다 저렇다 서로 보완하면서 즐기게 되었다.

……“그렇게 비참한 상황에 빠져있던 우리가 안나 카타리나를 동정해서 눈물을 흘리고 일리야 일프와 예브게니 페트로프의 <열두 개의 의자>에 우스워서 뒤집어졌다면 믿기지 않을 거예요.” (230쪽)


무엇보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소설에 시종일관 유머를 안겨주는 ‘올가의 반어법’이다. 그것이 단순한 독설이 아니라 권력자들로부터 올가 자신과 수용자들을 지키던 무기였으므로. 여성 수감자들을 강간하려는 고위 관리에 맞서 ‘흥, 그 출렁거리는 지방은 서지 않을 텐데. 거세 돼지인 주제에 허세를 부리지 말라구. ……아아, 더러워! 거세 돼지가 올라타느니 총살되는 게 낫겠어’라고 대거리하는 장면, ‘욕설과 함께 권력과 권위에 순종하지 않는 삶을 배웠다’는 올가의 회상 장면은 이 소설의 ‘반어법’이 가진 의미를 명료히 보여준다. 가에야마 구니오의 지적처럼 올가의 반어법은 ‘그들의 양심이 은밀히 살아남기 위한 마지막 의지처였으며, 그 작고 뾰족한 혀끝이야말로 전능한 스탈린 권력이 죽을 만큼 싫어하고 무서워했던 힘’이었다.



추리소설 구성, 개인사와 현대사를 교차시키는 다큐멘터리


대개 자기고백적인 형식을 취하는 ‘수용소 문학’과는 달리 이 소설은 여느 추리소설 못지않은 긴장감으로 가득하다. 볼쇼이 극장, 볼쇼이 발레 학교 등이 위치한 모스크바 거리를 헤매며, 소녀시절 동경했던 한 인물의 과거를 성인이 되어 풀어나가는 미스터리 형식은 소설 말미에 인물들의 정체가 밝혀지기까지 시종일관 독자들의 눈길을 잡아끈다. 그리고 이 미스터리 형식이 배경으로 하는 교차하는 세 개의 시공간―시마가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현대(1992년)의 모스크바, 올가가 발레교사로 활약하는 프라하 소비에트 학교 재학 시절(1960년대), 올가의 모든 것을 앗아간 스탈린시대(1930∼1940년대)―은 때로 겹치고 흩어지며 시간적, 공간적 깊이와 풍부한 입체감을 더한다. 그것은 주인공 ‘시마’의 개인사와 ‘올가’의 현대사를 촘촘히 교차시켜 개인의 삶에 아로새겨진 역사를 재현하려는 작가의 고민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수용소 소설이 결국 ‘사실史實’의 추체험에만 그친다면 소설로서 지닌 생명력은 쉽게 말라버렸을 것이다. 여기서 요네하라 마리가 사용한 방법은 새롭다. 눈물과 웃음으로 가득 찬 이 소설을 단순히 미스터리로 끝내지 않기 위해서 그녀는 철저히 아카이브 자료에 천착했다. 책 말미에 수록한 참고문헌의 다양한 자료들은 그녀가 역사학자 이상으로 스탈린시대의 기록에 매달렸음을 짐작케 한다. 기록뿐 아니라 직접 수용소 생존자, 갈리나 예브게니에브나 스테파노바(소설에도 등장한다)를 취재하는 열정 또한 철저한 기록으로 시대를 증언하려는 마리만의 미덕이다.


추리소설과 다큐멘터리를 동시에 보는 것 같은 착각을 안겨주는 『올가의 반어법』는 새로운 시대에 등장한 새로운 스타일의 수용소 문학이라 할 수 있다.



줄거리


이야기의 주인공은 러시아어 번역을 생업으로 하는 히로세 시마. 1960년대 초, 프라하의 소비에트 학교를 다녔던 그녀의 뇌리에 동구권 ‘해빙’ 뒤, 한 늙은 무용교사를 둘러싼 수수께끼가 오랜 상처처럼 욱신거린다. 재학 시절 어느 날, 올가 앞에, 살집이 좋은 커다란 남자가 스쳐지나가다가 쓰러지는 사건이 발생하자, 시마와 그녀의 어린 친구들은 호기심이 발동하기 시작한다……. 나이를 알 수 없는 발레교사 올가 모리소브나의 정체는 무엇이었던 걸까. 소비에트 붕괴를 거쳐 이미 마흔을 넘긴 시마는 그 진실을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에 모스크바로 날아가서, 아카이브에서 자료를 찾고, 어린 시절의 친구와 재회를 하며, 올가의 놀라운 운명을 모조리 알게 된다. ……올가가 경기를 일으키던 ‘알제리’를 의미하는 이 러시아어가 올가의 가혹한 운명을 뜻하는 ‘강제수용소’를 가리키는 약칭이었음이 밝혀진다.



추천사


요네하라 마리란 이름을 주목하게 된 건 그녀가 ‘러시아통’이란 사실 때문이다. 『대단한 책』에서 러시아 관련서들이 자주 등장하는 건 그런 이유에서일 테고 나는 이 책을 통해서 요네하라 마리의 세계에 입문했다. 빼어난 러시아어 통역사로서의 경험담은 그녀의 재치 넘치는 에세이 『미녀냐 추녀냐』에 잘 그려져 있다. 어떻게 해서 그런 전문 통역사와 에세이스트의 길을 가게 되었을까? 그녀는 픽션과 논픽션 두 권의 책으로 답해놓았다. 논픽션으로 분류된 『프라하의 소녀시대』는 1960년대 프라하의 소비에트 학교에서 소녀시절을 보낸 이 독특한 일본 여성이 중년에 이르러 학창시절의 단짝들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뛰어난 ‘소녀소설’이라는 평도 있지만 내가 읽은 최고의 ‘후일담 소설’이기도 하다. 그 후속작 『올가의 반어법』은 소비에트 학교에 한 여선생님에 대한 기억을 매개로 그녀의 개인사와 스탈린시대 러시아사史를 동시에 더듬어간 픽션이다. 그냥 픽션은 아니다. 유머러스한 문체에 담기긴 했지만 아픈 시대를 살았던 이들에 대한 슬픈 초상화다. 작가는 수용소를 경험한 러시아 작가들이 먼저 이 책을 읽어주기를 바랐다. 그다음 순서이긴 하나 우리도 한 시대의 삶과 진실을 음미하는 데 숟가락을 빼놓을 수 없겠다. 올가의 반어법대로 “정말이지 너무 기뻐서 미쳐 죽어버릴 것만 같은 걸!”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당신의 마음을 움직일 소설이다.

-이현우(로쟈, 알라딘 리뷰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