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드라마의 양식을 구축한 작가’의 대표적인 단편집
<나오키 상>을 수상한 「수달」「꽃 이름」「개집」 수록


‘홈드라마의 양식을 구축한 작가’인 무코다 구니코의 단편집, 『수달』이 작가의 사후 26년 만에 국내에서 처음으로 출간되었다. ‘단편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수달』은 오래 묵을수록 더욱 그 깊이를 드러내는 중후한 와인 같은 작품집이다. 최근 쏟아져나오는 청량음료 같은 가벼운 일본 소설에 싫증 난 독자들이라면, 빈티지가 1980년산인 『수달』에서 소설 읽기의 즐거움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수달』에는 1980년 제83회 <나오키 상>을 수상한 「수달」「꽃이름」「개집」을 포함한 단편 13편이 수록되어 있다. 아내와 남편, 실직자, 중소기업 사장, 임산부, 이혼녀에 이르기까지 중년의 남녀들이 그 주인공이다. 무코다 구니코는 엇갈린 부부 감정, 풀리지 않은 응어리, 양심의 가책, 무기력함 등 감춰졌던 내면이 드러나는 순간을 포착하여, 하나의 드라마로 엮어내고 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광경 속에서, 답답한 인생의 단면을 발견하고, 그것을 한 편의 작품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무코다의 소설은 날카로운 인간 관찰과 묘사가 압권이지만, 애틋함 또한 유지하고 있다. 본업이 드라마 작가였던 만큼, 이야기 하나하나를 영상으로 떠오르게 하는 솜씨가 뛰어나다. <나오키 상> 수상작가이자,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던 소설가 미즈카미 쓰토무는 “불과 세 시간 정도의 평범한 저녁 시간대에 사람의 삶과 죽음을 그려 넣는 힘이 있다”고 평하면서, 작품의 색조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저자는 일상의 소소한 것들에 가장 많은 흥미를 갖고 있다. 태양이라는 커다란 물체가 빛을 발산하면 그 빛은 냄비, 주전자, 찻잔, 문패, 신발, 창, 문 등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보는 물체에 부딪혀서 도구道具 안으로 숨어든다. 그리고 다시 빛을 역발산한다. 바로 이 빛이 도구의 색인데, 무코다 씨는 이 색들을 프리즘처럼 일곱 색깔의 무지개로 만들어서 보여준다. 무지개는 사라지지만 인생의 순간에 발산한 빛과 그림자로 엮어보면, 마음속 깊이 남을 수밖에 없다. 근사한 인생의 그림책이기 때문이다.” (241p)



인생이란 ‘행복의 끈’과 ‘불행의 끈’이 함께 꼬여 있는 것


영화잡지의 편집자로 일하다가 시나리오 작가로 전직한 무코다 구니코는 1964년에 TV 드라마 <일곱 명의 손자>를 쓰면서 본격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다. 그는 <데라우치 간타로 일가寺內貴太郞一家> <아수라처럼阿修羅のごとく> 등 20여 년 동안 1,000여 편이 넘는 각본을 쓴 왕성한 필력을 지닌 작가였다. 절묘한 대사와 정교한 구성을 지닌 그의 드라마는 ‘무코다 드라마’라 불리며 현대 홈드라마의 기초를 닦았다는 평을 받았을 정도다.


무코다 구니코는 이후, 수필가 및 소설가로도 활약했는데, 1980년에는 『추억의 트럼프思いでトランプ』에 수록된 「수달かわうそ」「꽃 이름花の名前」「개집犬小屋」으로 <나오키 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81년에 집필을 위해 대만을 여행하던 중,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고, 그 다음 해인 1982년에 그녀의 공적을 기념하여 우수한 각본에 수여하는 <무코다 구니코 상>이 제정되었다.


일본의 유명 여배우이자 작가인 구로야나기 테츠코는 『토토의 친구들』이라는 책에서 무코다 구니코와의 일화 한 편을 소개하고 있다. 하루는 자신의 대본 가운데, 

“인생, 화복은 끈과도 같다”라는 대사가 있어 그 뜻을 물었더니, 무코다 구니코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인생은 좋은 일이 있으면 반드시 그 뒤에 안 좋은 일이 찾아오거든요. 즉 행복의 끈과 불행의 끈, 이 두 개가 꼬여 있다는 이야기가 아닐까요?”


늘 마감 시간에 쫓기는 가운데, 유방암 수술과 수혈에 의한 간염으로 고생하기도 했던 작가는 <나오키 상> 수상이라는 영광을 안은 바로 그 이듬해에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인생을 ‘행복의 끈과 불행의 끈이 함께 꼬여 있는 것’으로 파악했던 작가는 그것을 고스란히 자신의 운명으로 보여주고 떠난 것이다.


2006년에는 무코다 구니코의 사후 25년을 맞아서 《소설 신초小說新潮》8월호에서 그에 대한 특집 기사를 대대적으로 다루었다. 주 독자층이 50대 이상이었던 이 잡지는 3~40대 여성들의 구매가 눈에 띄게 증가하였고, 9년 만에 매진되는 사태가 발생했다고 한다.


이 책을 번역한 김윤수 씨는 「옮긴이의 말」에서 “무코다 구니코가 불의의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뜬 지 올해로 26년이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의 작품은 드라마로 여러 차례 반복되어 만들어지고 있고, 중학교 국어교과서에서도 그의 작품들을 읽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업적과 재능에 대한 경의를 담은 오마주hommage적인 소설들도 발표되고 있다” (254p)라고 현지의 식지 않은 관심을 전하고 있다. 세월이 지나도 여전한 인기를 실감하게 하는 대목이다.



엇갈린 부부 감정, 중년 남녀의 일상생활


이 작품집의 표제작인 「수달」은 정년을 3년 앞둔 남편과 그 아내의 이야기다. 남편이 뇌졸중으로 요양하는 동안, 아내는 소중하게 가꿔온 마당이 있던 집을 허물고 아파트를 지으려 한다. 그러한 갈등 속에서, 남편은 늘 명랑하던 아내에게 마치 수달 같은 잔인함이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수달은 장난을 잘 친다.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먹이를 잡는 재미로 많은 물고기를 죽이기도 한다. 수달에게는 잡은 물고기를 늘어놓고 즐거워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물건을 늘어놓은 것을 ‘달제도’라고 한다” (22P)


그러고는 아내와 겪었던 예전 기억들을 떠올린다. 아버지의 장례식, 딸의 죽음, 이웃집의 화재……. 불행의 사건들마저 마치 축제처럼 여기는 아내의 모습을 되짚으며, 남편은 어느덧 살의마저 느낀다.


엇갈린 부부 감정이라는 주제는 「붙박이창」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아름다운 아내를 자랑스러워하면서도 한평생 질투로 괴로워한 아버지의 전철을 밟고 싶지 않아, 마르고 매력 없는 여자를 아내로 택한 주인공. 그러나 어느 날, 애교 섞인 목소리로 왕진 온 의사의 진찰을 받는 아내의 모습에서 지금껏 몰랐던 면을 발견하고는 묘한 배신감을 맛본다.


「꽃 이름」은 어느덧 훌쩍 변해버린 남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아내의 이야기다. 남편은 일에서는 뛰어나지만 꽃, 생선, 야채, 동물 등 일상의 자잘한 사물들에는 무신경하다. 아내는 그러한 남편에게 꽃 이름을 비롯한 사물의 종류 하나하나를 자세히 가르쳐주면서 우쭐해한다. 하지만 어느 날 낯선 여인에게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를 받고는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깨닫는다. “여자의 잣대는 25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지만, 남자의 눈금은 세월과 함께 늘어나 있었다”(219p)라는 독백은 수십 년을 함께 살았어도 알 수 없는 서로의 심연을 아득하게 표현해주고 있다.


중년 남성의 내면 묘사가 뛰어난 작품들도 눈에 띈다. 「맨해튼」에는 치과 의사인 아내에게 버림받고 하루하루를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중년의 실직자가 등장한다. 매일매일 의미 없는 일상을 반복하던 주인공은 동네에 새로 들어서는 ‘맨해튼’이라는 스낵바의 개업을 도와주면서 활력을 되찾는다. 생기 없던 주인공의 마음속에 생쥐가 온종일 작은 쳇바퀴를 돌리듯 “맨해튼” “맨해튼”이란 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한다. 주인공은 마담과의 달콤한 만남을 기대하지만, 별안간 단꿈은 깨어지고, 마음속에서 울려나오던 “맨해튼”도 사라지고 만다.

“쉰을 넘은 남자들 중에서 매일 아침 희망에 부풀어 눈 뜨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 그러한 사실들을 슬쩍 넘기는 데 담배는 참으로 편리했다”고 독백하는 「시큼한 가족」의 주인공, 속물 같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사람이란 다 이런 거지. 누구나 이 정도는 하고 있어”라고 합리화하는 「다우트」의 주인공 등, 중년의 메마른 내면 묘사가 쓸쓸한 공감을 준다.

“이들은 나름대로 걱정거리가 있지만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여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어딘지 모르게 우리 이웃집에 살 것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면서 바로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살아가다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간에 어느 순간 자신의 감춰졌던 모습이 드러날 때가 있다. 저자 무코다 구니코는 그러한 순간을 놓치지 않고 도려내서 하나의 드라마로 엮어내고 있다.”
(-「옮긴이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