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아자르, 혹은 로맹 가리 문학의 숨은 대표작


권총 자살, 공쿠르 상 두 번 수상. 에밀 아자르와 로맹 가리, 각기 다른 이름으로 열정적으로 활동했던 작가에게 늘 따라다니는 수식어다. 로맹 가리는 성공한 군인이자 외교관, 작가, 영화감독으로서 그야말로 화려한 삶을 살았다. 특히 작가로서는 프랑스에서 『유럽의 교육』으로 비평가상(1945)을, 『하늘의 뿌리』로 공쿠르 상(1956)을 수상하고, 미국에서는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로 최우수 단편상(1964)을 수상했을 정도로 전 세계적으로 그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더구나 로맹 가리 사후에, 그가 남긴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을 통해 자신이 『자기 앞의 생』으로 공쿠르 상(1975)을 한 번 더 수상한 에밀 아자르임을 밝혀 프랑스 문단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가면의 생』은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1976년 펴낸 세 번째 책이자, 전체 작품으로는 스무 번째로 발표된 것이다. 발표 연도순으로 보아 이 책은 『유럽의 교육』, 『하늘의 뿌리』,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자기 앞의 생』의 뒤편에 놓이지만, 이런 순서를 훌쩍 뛰어넘어 그의 문학에서 기원이 되는 소설이다. 요컨대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에서 그가 썼듯이 스무 살 때 시작해서 청춘 시절과 장년을 거치며 “쓰다가 포기했다가 다시 시작하기를 반복”한 이 작품은 예순 살이 넘어서야 완성된다. 이처럼 작품이 배태되고 성숙되어 마침내 세상에 나오기까지 걸린 시간이 무려 40년이었다. 그런 시간의 무게에 걸맞게 스무 살에서 예순 살에 이르기까지 작가 정신의 궤적―생의 이면의 채워지지 않는 내적 허기, 정체성에 대한 근원적 혼란, 문학의 본질에 대한 회의, 인간의 허위성에 대한 혐오―이 거의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아무도 아닌 동시에 그 모두인―가면 속의 가면


“폴란드인도 러시아인도 리투아니아인도 유태인도”, 그리고 엄밀한 의미에서 프랑스인도 아니었던 로맹 가리의 개인사적 특수성은 그를 일생에 걸친 변신에 투신하게 만들었다. 본명 ‘로맹 카체브’를 버리고 ‘로맹 가리’를 택한 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 이전에 포스코 시니발디(『비둘기를 안은 남자』), 샤탄 보가트(『스테파니의 얼굴들』)라는 가명으로도 작품을 발표한 바 있다. 그는 강박적이라고까지 할 만한 이런 변신에 대한 집착을 『가면의 생』에서도 여전히 보여준다. 이 소설에서는 그 ‘나’라는 것이 에밀, 폴, 알렉스, 팔레비, 자노 라팽, 미밀, 네네스 중 아무도 아닌 동시에 그 모두로 그려진다. 이 점을 『가면의 생』 발표 당시의 작품 외적인 요인과 관련지어 ‘없는 존재’인 에밀 아자르의 정체가 밝혀지지 않기를 바랐고, 그렇게 행동했으므로 일면 그 선에 머무른다고도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이는 더 나아가 로맹 가리가 줄곧 천착해온 “자기 자신의 개별적인 정체성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종種의 정체성”에 닿아 있다. 이 주제는 이 작품에서 자기가 “소속된 종種과 속屬”, 즉 인간의 “법칙에서 벗어나기”를 애쓰는 화자의 자의식과 잠재의식의 과잉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극단적으로, ‘나’가 꿈꾸는 것은 ‘익명성’이다.


나는 익명으로 남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익명의 시골 익명의 마을에서 익명의 여자와 익명의 사랑을 나누어 역시 익명의 가족을 이루고 익명의 인물들을 모아 새로운 익명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136쪽)


이러한 정체성 탐구에 곁들여 개인의 상처를 집단의 상처로, 개인적 죄의식을 집단적 죄의식으로 이끄는 로맹 가리 특유의 환치는 이 작품에서 더욱 실감나게 드러난다. 러시아계 유태인으로 겪었을 “소외와 전쟁과 홀로코스트와 불평등”에 대한 쓰라린 체험이 작가의 개인의식을 거쳐 ‘인간의 이중성, 양가성’에 대한 폭로로 치환되어 있는 것이다.


고문을 받아 죽어가면서 하나의 학살에서 또 하나의 학살로 옮겨 가는 존재가 핏속에 자리 잡고 있다. 고문하는 자와 고문당하는 자, 겁주는 자와 겁먹는 자, 짓밟는 자와 짓밟히는 자가 공존한다. 정신분열증 환자인 나는 둘로 분리된다. 말살하는 자이면서 말살당하는 자, 박해받는 플리우슈치이면서 박해하는 피노체트가 되는 것이다. 그럴 때면 나는 약물이라는 구속복拘束服과 정신과 의사들의 도움으로 극도로 ‘전복적이고 메시아사상에 입각한’ 병적인 인도주의에 사로잡혀서는, 모든 남자들이 내 형제요 모든 여자들이 내 자매라는 망상적 신념에 사로잡힌다. 그런 상태에 이르면 종종 마음이 편해진다.(158쪽)


더구나 이 소설은 경계 없는 시공간, 진실과 거짓, 이성과 비이성을 오락가락하여 읽는 이의 의식을 교란한다. 도미니크 보나가 전기『로맹 가리』에서도 지적했듯이, 이 때문에 정신착란자가 충동적으로 썼거나, 때로는 제법 시적이며 격렬하고 광기 어린 소설로 비친다. 하지만 정반대로 『가면의 생』은 전혀 미치지 않은, 오히려 광기를 가지고 장난을 치는 작가가 철저히 다다이즘의 자동기술법적으로 보이려는 글쓰기를 통해 용의주도하게 써내려간 작품이다. 앞서 말한 바 있는 정신이 온전한 작가 정신이 전모가 숨김없이 드러나는 것이다. 『게리 쿠퍼여 안녕히』, 『그로칼랭』, 『자기 앞의 생』 등도 틈틈이 모습을 비추면서 말이다. 여기에 섬뜩한 사실 한 가지. 에밀 아자르라는 가면 뒤에서 로맹 가리는 무려 1,000쪽에 달하는 세 가지 버전의 『가면의 생』을 써놓고 213쪽짜리 결정판이 나올 때까지 지독하게 고쳐 나갔다고 한다.



마침내 나는 나 자신을 완전히 표현했다


생애 마지막 편지에서 로맹 가리는 “마침내 나는 나 자신을 완전히 표현했다.”라고 썼다. 죽음에 이르러서까지도 철저하게 자신을 놓지 않은(그는 자신의 죽음이 오해받지 않게 하려 같은 내용의 편지를 여러 사람 앞으로 여러 통 남겼다) 로맹 가리다운 문장이다. 그 표현은 로맹 가리-에밀 아자르 문학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면서, 특히 『가면의 생』에 가장 잘 어울린다. 이 소설이 끝임 없이 ‘나’의 정체성과 자의식에 몰입하면서, 정신착란자의 입을 통해 작가란 무엇인가에 대해 진실되게 되묻고 있음에서다.


“나는 에밀 아자르예요!” 하고 나는 내 가슴팍을 두드려대며 외쳤다. “유일하고 독특한 존재란 말이에요! 나는 내 작품의 아들이자 아비이기도 해요! 나는 나 자신의 아들이자 아비란 말이에요! 나는 아무에게도 빚진 것이 없어요! 나는 나 자신의 저자이며 그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어요! 나는 진짜예요! 속임수가 아니라고! 나는 위장이 아니에요! 나는 고통 받는 인간이에요. 더더욱 고통 받기 위하여, 내 책에, 세상에, 인류에게 더 많은 것을 주기 위해 글을 쓰는 인간이라고요! 내 작품에 관한 한 나로서는 감정도, 가족도 없어요! 중요한 것은 작품뿐이에요!”(203쪽)



『가면의 생Pseudo』의 패러독스―문학은 우리보다 위대하다


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에 “『가면의 생Pseudo』은 거의 모든 부분이 완벽한 허구다.”라는 문장을 남겼다. 이 소설은 에밀 아자르라는 가면을 쓰고 로맹 가리가 쓴 것이고, 여기에서 ‘Pseudo’는 직역하자면 ‘가짜’, ‘거짓’이다. 논리학에서 유명한 “어떤 크레타인이 말하기를 크레타인은 모두 거짓말쟁이다.”라는 명제가 떠오르게 한다. 이 명제식으로 표현하자면 로맹 가리의 언사는 이렇게 변환될 것이다.


로맹 가리가 말하기를 내가 ‘가짜’ 에밀 아자르로 쓴 『거짓』은 거의 모든 부분이 완벽한 ‘거짓’이다.


평생 변신하는 데 골몰한 로맹 가리의 말이라 그가 쓴 문장은 거짓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또 다른 변신을 위해 권총을 입안에 넣었을지도 모를 일 아닌가. 그러므로 『가면의 생Pseudo』은 전혀 도외시해야 할 부분도 없고, 전적으로 사실이라 생각해야 할 부분도 없는 듯하다. 이는 분명 뇌의 긴장을 풀고, 화자의 맨 정신과 흐린 정신을 같이 넘나들며 즐기듯 읽어야 하는 소설임에 분명하다. 그러다 보면 자연인이 아닌 ‘작가’로서 마침표를 찍은 로맹 가리가 자연스럽게 떠오르며, 불쑥 이런 한마디가 튀어나올지도 모른다.


빌어먹을, 문학은 우리 모두보다 훨씬 더 위대하다.(20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