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만의 쪽빛을 찾아 동아시아를 돌아다닌 염색가
이 한 권의 여행을 통해 ‘푸른 바다’를 마신다

 

저자 신상웅은 염색가다. 어린 시절부터 색에 취해 미술대학을 나왔고 대학생 때부터 벌교의 염색 공방을 드나들다가 졸업 후 아예 고향 괴산에 눌러앉아 수십 년이 지나도록 염색 일을 해왔다. 그의 주 종목은 푸른색, 그중에서도 ‘인디고 블루’라 불리는 짙은 푸른색이다. 자연염료인 ‘쪽’을 길러 수확하고 그 색을 천으로 옮기는데, 그의 손에 쪽물이 짙게 배어갈 즈음 시시각각 천차만별인 푸른색들을 보며 그는 의문에 빠졌다.

 

쪽에서 풀려나온 색소들은 물을 들이는 횟수와 천의 두께 혹은 내가 가늠하기 어려운 다른 조건들에 의해서 저마다의 푸른색으로 살아났다. 하나씩 떼어놓고 보면 그 차이를 실감하기 어려웠지만 한곳에 모아놓고 나면 같은 것이 없었다. 저 푸른 것들 사이에 다른 누군가 쪽물을 들인 천을 섞어놓는다면 내 것이 아닌 것을 골라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멈칫했다. 어림없었다. (…) 내 손으로 물을 들인 것이 분명한데도 내 것이란 확신이 들지 않았다. 나는 산모가 아니라 산파인 셈이었다.
-「들어가며」에서

 

그가 안다고 생각하던 푸른색은 없었다. 그만의 푸른색은 없었다. 모아놓고 보면 자신이 뽑아낸 색조차 가려내기 힘드니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요컨대 색이란 본래 자연의 것이고, 그는 산파나 영매처럼 색을 받아낼 뿐이었다. 그는 염색가로서 자신의 고유한 색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화포, 즉 ‘짙은 남빛에 흰무늬를 박은 무명’을 알게 되었다. 흰무늬, 그것은 천에 자신의 의견을 남기는 것과 같았다. 물을 들일 부분과 들이지 않을 부분을 아는 것은 곧 자기 색을 갖는 일이었고 장인의 경지에 이르는 길이었다. 그 뒤로 그는 동아시아의 화포들을 찾아다녔다. 장인들의 숨결을 보고 듣고 느끼며 그만의 색을 찾으려는 여정이었다.

『쪽빛으로 난 길』은 염색가 신상웅이 10여 년간 중국, 태국, 베트남, 라오스, 일본 등을 돌며 그 지역의 염색과 민족과 문화와 일상을 두루 관찰한, 목적이 분명한 기행서다. 어느 날 연암의 아들 박종채가 쓴 『과정록』에서 연암의 화포에 관한 언급을 발견하고 떠날 채비를 하게 된 이 여행은, 합성염료와 공장이 들어서면서 나날이 자취를 감춰가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전통 화포의 흔적을 쫓는 여정이 주축이다. 중국의 거대한 산과 강과 평야를 건너 베트남으로, 라오스로 또 일본 교토로 걸음을 옮기는 사이, 저자는 여러 소수민족과 장인들을 만나며 전통과 현대, 그 정서와 변화하는 세월을 엿본다. 염료, 공기, 햇빛의 조화에 따라 매번 다르게 물드는 무명처럼 『쪽빛으로 난 길』은 사람과 장소의 검질긴 교감을 다룬 여행기로서, 화포를 쫓는 추리물로서, 그리고 여러 민족의 일상과 역사를 담은 민족지로서 다채로운 읽기 경험을 선사한다.

 

‘화포와의 인연’들을 녹인 이 책은 꿈틀거리며 압도하는 인류의 오래된 기억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 안속에서 지워져 없어진 ‘푸른 바다’를 이 한 권의 여행을 통해 마실 수 있다니 벌써부터 속이 특별해진다.
-이병률(시인)

 

 

쪽물로 들인 푸른색이 바래기 전에
중국-베트남-라오스, 소수민족의 삶을 따라서

 

『쪽빛으로 난 길』은 크게 네 개의 여정으로 이루어졌다. 그중 1부 「푸른색의 바다」와 2부 「몽족의 푸른 기억」은 중국 소수민족인 먀오족과 먀오족에서 파생한 것으로 짐작되는 몽족의 푸른색, 화포, 삶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언젠가 저자는 장샤오숭의 『민초들의 노래草根絶唱』라는 책을 접한다. 그 책에는 먀오족이 아직도 진한 쪽물을 들인, 흰무늬를 박은 푸른 천으로 옷을 지어 입으며 구이저우 성, 윈난 성, 후난 성 등에 퍼져 산다고 쓰여 있었다. 시골 오지까지 근대화가 밀려와 전통 염색이 거의 모습을 감춘 지금, 저자는 화포가 일상인 먀오족의 삶을 더 늦기 전에 눈에 담아 와야 했다.

 

이곳의 먀오족은 지금도 여전히 쪽을 심어 물을 들이고 그것으로 옷을 만들어 입는다고 했다. 게다가 화포라니……. 공예가나 몇몇 전문가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벼를 키워 쌀밥을 먹듯 일상 속에 푸른 쪽 염색과 화포가 현재까지 남아 있다는 것이 믿기질 않았다. 그것이 가능한 삶이란 어떤 것일지 상상조차 어려웠다.
-23쪽

 

레이궁 산을 넘고 두류 강을 건너 첸둥난의 먀오족 마을에 닿은 저자는 “웨량 산 밤하늘의 색”을 옮겼다는 먀오족의 화포를 만나지만 마냥 즐거운 일만은 아니었다. 버스와 택시에 올라 중국의 넓고 굴곡진 땅덩이를 이동하는 육체도 고되지만, 첸둥난에서도 그리고 내친김에 찾은 후난 성의 펑황고성에서도 먀오족의 수난의 역사를 마주해야 했기 때문이다.

 

먀오족은 중원의 세력에 대항해 수없이 반란을 일으켰다. 명나라 중기에 먀오족은 또 다른 소수민족인 야오족瑤族과 합세해 구이저우 성과 광둥 성 일대까지 세력을 넓힌다. 하지만 몇 년 뒤 명나라가 보낸 몽골의 기마병과 군사 들에게 패하고 만다. 이 지역에 진군한 명의 군대는 그들에게 대항한 먀오족과 야오족은 물론 토착 세력까지 무참히 도륙한다. 포로로 붙잡힌 수천의 먀오족 소년들은 거세되어 명 황실의 노예가 되었고 토벌에 참가한 병사들은 땅을 하사받고 이 지역에 정착했다. 먀오족 여자들은 그들과 강제로 결혼해야 했다.
-75쪽

 

이런 수난들 속에서도 먀오족의 어떤 이들은 그 자리에 남아 끈질긴 생명력으로 고유한 염색 문화를 이어가고 있었고, 또 어떤 이들은 국경을 넘어 더 남쪽으로 안정된 삶을 찾아 떠났다는 소문을 남겼다. 저자는 그들을 찾아 다시 여행길에 오른다. 중국 윈난 성의 창 산과 란창 강을 건너 태국과 라오스와 베트남으로, 흙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와 마약왕이 살았던 마을과 도시 자체가 하나의 사원인 곳으로 걸음을 옮기고 사람들에 섞여든다. 이 모든 게 먀오족에서 몽족으로 이어지는 전통과 거기 서린 희로애락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오직 푸른색과 흰 문양 때문에 촉발된 저자의 여행은, 이렇게 소수민족의 삶과 섞이며 은은하고 그윽해져갔다. 타인들의 삶을 관찰자의 시선으로 무리하게 보정하지 않고, 함께 사귀고 마시고 대화하며 날것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최부와 조선통신사가 걸었던 중국과 일본
책과 염색과 역사가 어우러진 그 길

 

조선의 관리였던 최부는 1488년 정월 제주도에서 부친의 부음을 듣고 고향인 나주로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 바다에 표류한다. 그와 마흔두 명의 사람이 배에 타고 있었다. (…) 밀감 쉰 개와 청주가 동이 나자 마른 쌀과 오줌을 받아 먹으며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정처 없이 파도에 떠밀리던 바다에서 ‘긴 기와집 행랑’ 같은 고래를 보기도 했다. 최부가 중국에 표류하여 우여곡절 끝에 조선에 도착하기까지 6개월간의 기록이 『표해록』이다.
-210쪽

 

저자는 전통과 단절되지 않았던 시대의 진짜 화포에 여전히 목이 말랐고, 그래서 다시 중국을 찾았다. 염색은 물길 주변에서 성했다. 저자는 3부 「화포의 그림자」에서 ‘경항대운하’가 있는, 일찍부터 교통과 상업이 발달했던 중국 저장 성의 사오싱에서 다시 여행을 시작한다. 사오싱은 루쉰의 고향이며 조선의 관리였던 최부가 바다에서 표류하다 밟은 땅이다. 저자에게는 최부가 쓴 표류일지 『표해록』보다 더 참고가 되는 것이 없었다. 저자는 『표해록』의 여정을 따라 저장 성의 물류가 모여들던 항저우, 창 강과 대운하가 교차하며 부유한 염상들이 문화예술을 부흥시켰던 양저우, 북쪽 황허 강과 남쪽 창 강 사이에 넙치처럼 엎드린 화이안, 그리고 랑산, 난퉁, 원저우 등을 끊임없이 옮겨 다닌다. 화포와 『표해록』과 즉흥적인 만남들이 뒤섞인 기행 속에서 저자의 세상은 넓어지고 색은 더욱 깊어갔다. 전통과 관습 전에 삶이 있음을 여행 속에서 알아갔다.

 

푸른색이든 화포든 누군가의 손에 의해 이리저리 옮겨 갈 것이고 다시 누군가의 손에 의해 또 다른 모습으로 태어날 것이다. 최부는 청천벽력 같은 바다의 풍랑을 만나 낯선 땅으로 흘러들었고 그 길에서 보고 들은 것을 적어 조선에 전했다. 그렇게 이곳의 것들이 저곳으로 번져갔고 저곳의 다른 것들이 또 다른 세상으로 흩어졌다. 그것들이 굳어버린 관습에 어떤 균열을 만들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 잡탕의 혼돈과 무질서가 겨우 내가 믿는 것들이었다.
-277쪽

 

4부 「춤을 물들이다」는 일본 교토의 장인을 만나러 가는 여정이다. 저자를 일본으로 떠나게 만든 것은 조선통신사 서기들의 기록이 실린 『해행총재』. “곳곳에 깃발이 바람에 어지러이 날리는 것을 물어보니 술집과 염색집이라 한다”던 그 기록에 저자는 뛰는 마음을 멈출 수 없었다. 그길로 저자는 조선통신사가 걸었던 교토부터 나고야, 나라, 그리고 일본 최대의 염료 생산지였던 도쿠시마 등을 돌았다. 그리고 일본의 고유한 거리와 사람과 축제, 대중교통과 료칸과 스치는 인연 같은 사소한 것들까지 섬세하게 기록했다. 어쩌면 고유한 색이란, 스스로 실올이 되어 세상이라는 염료를 “격한 사랑을 나누는 것처럼” 빨아들인 뒤에야 얻어지는 것이리라고, 저자는 쪽빛처럼 아스라한 여정을 통해 이야기한다.

 

 

추천사

 

좋아하는 것에 순정을 가졌다는 것은 인생의 힘줄이 된다. 그리고 그 좋아하는 것에 미친다는 것은 인생의 샘물이 된다. 이 아슬아슬한 세상에, 묵묵히 그가 걸어왔던 길은 비겁하게 세상 눈치나 보며 사는 나를 자주 부끄럽게 했다. 한 사람의 어떤 고집 앞에서 인간의 밑바닥들은 마침내 경의를 표하고 만다. 신상웅 작가는 사람이 쪽빛이더니, 쪽빛을 가지고 논다. 마음결이 곱더니 이제 그 결을 가지고 논다. 그가 길 위에서 만난 ‘화포와의 인연’들을 녹인 이 책은 꿈틀거리며 압도하는 인류의 오래된 기억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 안속에서 지워져 없어진 ‘푸른 바다’를 이 한 권의 여행을 통해 마실 수 있다니 벌써부터 속이 특별해진다.
이병률 (시인, 여행작가)

 

내가 홍천의 산골에서 대패질을 하는 동안 그는 괴산의 고향 집에서 푸른 쪽물을 들였다. 날이 추워지면 어디론가 떠나 봄이 되어서야 돌아온다고 했다. 그렇게 10여 년이 흘렀다. 그의 길은 단순히 푸른색의 서사만을 좇지 않는다. 베트남 박하의 시장이든 대운하의 수로 위에서든 그가 사람과 색과 풍경을 만나는 장면을 보며 나는 ‘여행의 태도’를 생각했다. 사람과 사람이, 사람과 사물이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를 다시 생각했다. 
이정섭 (목수, 내촌목공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