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 100주년에 다시 읽는 메를로-퐁티


지난 3월 14·15·16일에 불가리아의 소피아 대학에서 모리스 메를로-퐁티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학술회의 ‘CONFERENCE 100 YEARS MERLEAU-PONTY’가 열렸다. 소피아 대학의 메를로-퐁티 학회Merleau-Ponty Circle가 주최한 이 자리에는 프랑스를 포함한 세계 각국의 메를로-퐁티 연구자들이 참석하였다(올 9월에는 국제 메를로-퐁티 학회International Merleau-Ponty Circle도 메를로-퐁티 탄생 100주년을 되새기며 ‘시간, 기억, 그리고 주체Time, Memory, and the Self’라는 제목으로 제33차 정기 학술회의를 개최할 예정이라 한다. 이 학술회의는 캐나다 라이어슨 대학에서 열린다).


3월 14일은 바로 1세기 전에 메를로-퐁티가 태어난 날이다. 메를로-퐁티는 현상학자 후설의 저작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최초의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는 철학자다. 그는 당대의 유명한 사상가들―장-폴 사르트르, 시몬느 드 보부아르,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조르주 바타유, 자크 라캉, 알렉산더 코제브 등―과 교류하였고, 사르트르와 함께 현대 프랑스 철학의 최고봉으로 언급된다(그의 저작에 대한 해설에는 헤겔, 후설, 하이데거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말이 종종 등장한다).


그러나 사후에 메를로-퐁티는 하이데거와, 한때 맑스주의의 동지였다가 결별한 사르트르의 그늘에 가려버렸다. 그런 이유로 프랑스 밖으로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유럽 권에서는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고, 최근 들어서는 북아메리카 대륙의 철학자들이 메를로-퐁티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활발하게 번역하며 연구도 함께해나가고 있다. 프랑스의 후기구조주의 철학이 전 세계를 휩쓸다시피 하는 와중에, 더구나 ‘몸(그리고 살)의 철학자’ 메를로-퐁티가 세상을 떠난 지 50년이 다 되어가지만, 그의 뛰어난 저서인 『행동의 구조』와 『지각의 현상학』을 위시하여 다른 저작들이 여전히 흥미롭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메를로-퐁티의 인기는 더해가고 있다. 200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번역 출간되기 시작한 메를로-퐁티의 저작은 『지각의 현상학』을 필두로 하여,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휴머니즘과 폭력』 『간접적인 언어와 침묵의 목소리』 『행동의 구조』까지 거의 해마다 한 권씩 선을 보이고 있다. 마음산책에서 출간하는 『눈과 마음』은 그 뒤를 잇는 6번째 책이다.



마지막 숨결을 담은 시적인 회화론, 또는 미학 에세이


『눈과 마음』(1964)은 메를로-퐁티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완성한 마지막 글이다. 《프랑스 예술》이라는 잡지의 창간호에 실릴 글을 청탁받은 메를로-퐁티는 에세이 한 편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1960년 여름의 대부분을 이 글을 쓰는 데 바쳤고, 세상을 떠나던 해인 1961년에 완성하였다. 이 책은 그의 사후에, 서문을 쓴 클로드 르포르에 의해 정리, 출간되었다.


메를로-퐁티는 소설, 회화, 영화 등 예술 전 분야에 관심을 보였고, 특히 회화에 대해 각별히 생각하였다. 미술과 철학이 사물을 놓고서 다룬 방식을 한데 엮은 『미술 속, 발기하는 사물들』에서, 철학자 조광제가 “미술이 궁극적으로 노리는 사물의 모습을 철학에서 만나기 위해서는 메를로-퐁티를 만나야 한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구체적으로 메를로-퐁티는 「세잔의 회의」(1945)라는 초기 에세이에서 이미 회화를 성찰한 적이 있었고, 이는 「간접적인 언어와 침묵의 목소리」(1952)로 이어진다. 그리고 『눈과 마음』에 와서는 회화 전반을 아우르며 연관 분야까지 다루어 심화시키고 있는데, 그는 세잔, 고흐, 자코메티, 렘브란트, 마티스, 클레, 제리코, 카라바조, 뒤샹, 앵그르, 루오의 그림과 헨리 무어, 제르멘 리시에, 로댕의 조각, 연속동작 사진 촬영가chronophotographer 마레이의 사진까지 포괄한다.


메를로-퐁티의 연구자들이 ‘애매함ambiguïté’이라고 규정한 글의 특징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이 책에서 메를로-퐁티가 펼쳐나가는 회화론, 또는 미학 에세이는 다분히 시적이다. 클로드 르포르의 말을 빌려오자면,


회화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 『눈과 마음』의 저자는 새로운 언어une parole neuve의 자원을 얻는다. 문학적 언어와 매우 가깝고, 시적 언어와도 매우 가깝다. 이 언어는 물론 논증하는 언어지만, 학계의 전통상 철학적 담론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생각되던 모든 기교들을 성공적으로 피해간다.(「서문」에서)


이 책은 『지각의 현상학』이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만큼 난해하지는 않은, 철학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예술적인 텍스트다.



그림은 화가의 몸을 빌린 사물(세계)의 것


모두 5장으로 이루어진 『눈과 마음』은 “영혼이 회화를 통해서 사물들을 느끼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하는 데카르트의 논법과 데카르트주의자, 그리고 “사물들을 조작하며, 사물들에 거하기를 포기”하는 근대과학을 비판한다. 메를로-퐁티는 ‘눈(시지각視知覺)’과 ‘그림’이 ‘영혼의 창문’이며, “눈을 통해 응시하는 우리 앞에 우주의 아름다움”이 드러나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게 바로 화가와 그의 그림이라고 본다.


세잔은 ‘세계의 순간’을 그리고자 했다. 그리고 그 순간은 오래전에 지나갔다. 그러나 세잔의 캔버스는 지금도 우리에게 이 순간을 쏟아낸다. 세잔의 생트 빅투아르 산이 내가 보는 화폭 속의 세계에서 생겨났다 사라졌다 다시 생겨나는 방식은 엑상프로방스를 굽어보는 단단한 바위산이 존재하는 방식과는 다르지만, 세잔의 산이 뿜어내는 힘은 엑상프로방스의 바위산에 못지않다.(67쪽)


세잔에 따르면, 색은 “우리 뇌와 우주가 만나는 곳”이다.(109쪽)


메를로-퐁티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화가는 주체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존재지만, 정반대로 “자기 몸을 세계에 빌려주며, 이로써 세계를 회화”로 바꾸는 수동적인 존재기도 하다는 것이다.


화가와 보이는 세계 사이에는 불가피하게도 역할의 역전이 일어난다. 그토록 많은 화가가 사물들이 자기를 본다고 말한 것은 그 때문이다. 앙드레 마르샹André Marchand도 클레Klee와 비슷한 말을 했다. “숲에서 나는 여러 번에 걸쳐 이런 느낌을 받았다. 내가 숲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었다. 나무가 나를 바라보았고 나무가 나에게 말을 했다. …… 나는 그저 귀를 기울였다. …… 화가는 우주에게 관통돼야 하지 우주를 관통하길 원해서는 안 된다.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 나는 깊이 잠기기를, 깊이 묻히기를 기다린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거기서 빠져나오기 위해서인 것 같다.”(61쪽)


다시 한 번 클로드 르포르의 말을 빌려오자면, “화가의 작업을 보면서 메를로-퐁티는 시지각과 보이는 세계의 분할 불가능l’impossible partage, 현상과 존재의 분할 불가능을 믿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기존의 믿음을 이 책에서 더욱 강화하고 있다. 「세잔의 회의」에서 그랬듯, 메를로-퐁티가 궁극적으로 생각하는 회화의 주체는 곧 사물이며, 이러한 회화론은 그의 몸 현상학―몸이 이미 존재하는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세계에의 존재’라는, ‘나의 시선(주체)과 타인의 시선(주체)은 본래 하나’라는―과 버무려져 있다.


움직이는 내 몸은 보이는 세계에 속하며, 보이는 세계의 일부를 이룬다.(35~36쪽)


보는 이는 자기가 보는 것을 자기 것으로 삼지 않는다. (보는 이는 자기 몸으로 인해 보이는 세계 속에 잠긴다. 그의 몸 자체가 눈에 보인다.) 보는 이가 보이는 세계로 다가가는 방법은 오직 시선밖에 없다. 보는 이는 보이는 세계로 통한다.(37쪽)


시지각은 사물들의 한복판에 잡혀 있다. 다르게 말하면, 시지각은 사물들의 한복판에서 생겨난다. 어느 쪽이 됐든, 보이는 것이 보기 시작하고(보이는 것이 보이는 것 자신에게 보이게 되는데, 보이는 것이 자신을 보는 방법은 모든 사물들의 시지각을 통해서다), 느끼는 이와 느껴지는 것이 (마치 결정입자 속의 모액母液처럼) 미분화 상태를 고수한다.(41쪽)


눈은 영혼에게 영혼이 아닌 것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는 기적을 행한다. 눈을 통해 영혼은 사물들의 행복한 영역에, 그리고 사물들의 신 곧 태양에 다가갈 수 있다.(138쪽)


요컨대 『눈과 마음』은 메를로-퐁티의 철학에 여러 화가들―본문 곳곳에서 등장하는 세잔, 클레, 자코메티, 막스 에른스트, 로댕 등―의 말/예술론을 적적히 원용한 현상학적인 회화론이다. 또 한편으로는, 메를로-퐁티와 화가들 사이에 공통의 먹잇감인 ‘사물’이 있으며, (철학자 조광제의 표현대로) “궁극적으로 미술이든 철학이든 사물을 통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음을 적극적으로 보여주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