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어제’에는 인류의 발자국이 남아 있다


“이 한걸음이 나 한 사람에게는 작은 발걸음일 뿐이나 인류 전체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다That's one small step for man, one giant leap for mankind.” 1969년 7월 20일 지구인 최초로 달 표면에 발을 내디딘 닐 암스트롱Neil Armstrong이 남긴 말이다. 그날의 발자국이 ‘고요의 바다’에 찍혔고, 문명사회의 거의 모든 사람이 흥분한 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어느덧 한 세대가 흘렀지만, “숯가루처럼 부드러운” 달의 표면에 처음 찍혔던 암스트롱의 ‘발자국’은 여전히 인류의 뇌리에 선명하다.


그 한 날 7월 20일처럼 인류의 모든 어제에는 ‘작은 발걸음’이건 ‘위대한 도약’이건 그날을 살아간 사람들의 발자국이 남아 있다. 이 책에서 저널리스트 고종석은 지나간 오늘의 수많은 인물과 사건을 좇아 역사적인 행보를 답사한다. 답사의 대상은 작가(가르시아 로르카)에서 철학자(한나 아렌트), 종교인(성철), 예술가(자코메티), 음악가(빌리 홀리데이), 정치가(마오쩌둥), 유학자(김창숙), 학자(노엄 촘스키), 출판인(가스통 갈리마르), 언론인(프랑수아즈 지루), 사업가(질레트), 배우(오드리 헵번), 군인(클라우제비츠), 운동선수(무하마드 알리), 발명가(구텐베르크), 탐험가(모리스 에르조그), 그리고 사노맹社勞盟, 민정당民正黨, 중화인민공화국과 같은 집합체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다. 그들과 함께 수많은 전쟁과 독재, 차별과 같은 폭압, 그에 대한 투쟁과 승리의 사건들, 시, 소설, 연극, 영화, 음악, 연구 저작물, 발명품, 한글과 같은 문화유산들이 지구의 1회귀년(윤년)에 걸맞은 366꼭지를 이룬다.



휴머니스트의 눈으로 역사의 ‘발자국’을 새로 헤아리다


이 책에서 저자는 역사의 발자국을 따라 답사하되 그대로 답보하지는 않는다. 역사에 오른 인물이나 사건이 해악스러웠음에도 그에 대한 당시의 평가가 칭찬 일색이었다면 깎아내리고, 인류의 자유와 평등에 이바지하였음에도 평가 절하하였다면 제값에 맞게 돋워준다. 저자에게 역사적 사실들이란 마냥 떠받들어야 할 금과옥조가 아니라 “앞으로 나아갈 길을 헤아리기 위해”, 그리고 “과거에 잘못 들었던 길을 반복하여 가지 않기 위해 과거의 잘못을 계속 점검하면서 고치려고 노력하는” 데 필요한 방편이기 때문이다. 이는 드라이브인 극장의 탄생을 다룬 「드라이브인 극장」(182쪽)처럼 사실에 대한 기술로만 일관한 글로 나타나기도 하고, 비이성적 애국주의를 앞세워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한 히틀러와 조지 W. 부시를 한데 엮은 「전권위임법全權委任法」(99쪽)처럼 기술과 비판을 적적히 아우른 글로, 박정희가 스러진 날의 감회를 떠올린 「박정희朴正熙의 추억」(334쪽)처럼 냉철한 비판이 가득한 글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사실은 그 반대다. 박정희의 죽음에 슬픔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의 권력욕에 치여 무고하게 죽고 다친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예의 말이다. 박정희 시대는 중앙정보부와 ‘빙고호텔’의 물고문ㆍ전기고문의 시대였고, 조작간첩과 불법 납치ㆍ연행과 의문사의 시대였고, 야간통금과 장발단속과 치마단속과 금지곡의 시대였고, 전태일의 분신과 김경숙의 투신의 시대였고, 학생 군사훈련과 일상적 국민의례의 시대였고, 일본인들의 섹스관광의 시대였고, 권력자들의 황음荒淫의 시대였다.



‘작음 발걸음’이 사실은 ‘위대한 도약’, 소수를 떠올리다


휴머니스트의 비판적 안목을 유지하며 저자는 “되도록 소수자에게 눈길을 주고자” 하고, “남성보다는 여성을, 백인보다는 유색인을, 다스리는 자들보다는 저항하는 자들을 바라보고자”(「군소리」) 한다.


1954년 5월 17일 미국 연방대법원이 흑인 민권운동사의 한 획을 그은 판결을 내렸다. 린다 브라운이라는 흑인 소녀의 아버지 올리버 브라운이 캔자스주 토피카 교육위원회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얼 워렌 대법원장은 유색인과 백인에게 별개의 교육 시설을 제공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흔히 ‘브라운 대對 토피카 교육위원회 사건’이라고 불리는 이 소송의 판결은, 1896년의 ‘플레시 대 퍼거슨 사건’에서 인종들에 대한 ‘평등하되 분리된’ 교육 시설의 제공을 지지함으로써 흑인과 백인의 분리를 합법화한 반세기 전 대법원 판결을 뒤집은 것이었다.(「브라운 소송」, 159쪽)


따라서 이 책에서 다룬 인물들 가운데는 사회주의 운동가 한위건韓偉健과 미국 독립혁명에 불을 붙인 흑인 노예 크리스퍼스 어턱스Cripus Attucks, 샹송 가수 달리다Dalida, 탈주병 슬로빅Slovic처럼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들이 꽤 있다. 마찬가지로 사건들 가운데서도 사브라ㆍ샤틸라 학살과 목포 부두노동자 파업과 같이 이름만 봐서는 선뜻 내막을 알기 힘든 것들도 제법 된다.


저자가 힘주어 말한 대로 『발자국』은 힘없는 자들의 ‘작은 발걸음’이 사실은 ‘위대한 도약’이었음을 밝히는 데 많은 부분 바쳐지고 있다. 그럼에도 “여기 모인 글들의 질료 노릇을 한 역사 자체가 힘센 자들에게 워낙 편향돼 있는 터라, 이 책에 등장하는 여성, 유색인, 저항자들은 말 그대로 소수를 넘어설 수 없었다.”(「군소리」) 저자의 고백은 서글프지만, 그래서 오히려 울림이 크다. 내일의 역사는 누구를 위한 것이어야 할지 깊이 생각해보게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