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맨부커상 최종심 후보 작가,

줌파 라히리의 퓰리처상 수상작 『축복받은 집』

 

2013년 9월에 발표한 두 번째 장편소설 『로랜드The Lowland』로 영국 맨부커상 최종심과 미국 내셔널북어워드 본심에 오르며 작가로서 자신의 자리를 굳힌 줌파 라히리의 첫 소설집 『축복받은 집』의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이로써 『이름 뒤에 숨은 사랑』(2004)을 시작으로 『그저 좋은 사람』(2009)을 펴내며 줌파 라히리의 작품을 본격적으로 한국 독자에게 소개한 마음산책에 그의 전작이 모였다. 『로랜드』(가제)는 2014년 상반기에 출간될 예정이다.
첫 소설집으로 1999년에 오 헨리 문학상과 펜/헤밍웨이 문학상, 2000년에 퓰리처상을 수상하며 미국 문단에 등장한 줌파 라히리도 어느덧 데뷔한 지 십 년이 훌쩍 넘은 중견 작가다. 단편소설집과 장편소설을 각각 두 권씩 번갈아 발표하며 자신의 문학 이력을 차곡히 쌓은 그의 문학사는 단순히 작가 한 사람의 문학사가 아니라 미국 문학, 세계문학 전체의 역사와 맞닿아 있다. ‘이민자 문학’은 없다며, 그런 문학이 있다면 ‘거주자 문학’이 따로 있느냐고 반문하는 라히리의 목소리는 정체성을 규정당하기를 거부하는 문학 본연의 목소리 자체다. 미국인이라는 말도, 인도인이라는 말도 어색한 인간 줌파 라히리의 의구심 가득한 시선이 특유의 담담한 필체와 만나 묘한 아이러니를 자아낸다. “보기 드물게 우아하고 침착한 작가”의 “세련된 등단집”이라며 극찬을 받은 『축복받은 집』에는 『이름 뒤에 숨은 사랑』 『그저 좋은 사람』 『로랜드』를 관통하는 줌파 라히리의 문제의식이 압축적으로 담겨 있다. 그 묘미를 번역가 서창렬의 새로운 번역으로 맛볼 수 있다.

 

각 단편을 읽고 나면 그 인물들과 함께 장편소설 속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라히리의 성공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뉴욕타임스 북리뷰>

 

수록된 모든 소설이 뛰어난 소설집은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여기 있다.
<샌디에이고유니언트리뷴>
 

 

익숙하지만 낯설게 본다

경계에 선 자의 날 선 시선

 

서른셋의 젊은 나이에 장편소설이 아닌 단편소설집으로 ‘미국인’의 정체성이 아닌 ‘미국에 사는 사람’의 정체성 문제를 주로 다루면서 퓰리처상을 수상한 이례적인 이력은 쉽게 주류, 비주류로 단정할 수 없는 그의 독특한 문학적 위치를 잘 말해준다. 많은 작가들이 천착해온 화두를 다룬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를 주류의 자리에 놓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자신만의 화법으로 낯선 느낌을 자아낸다는 점에서 비주류의 자리에 놓기도 한다. 그렇기에 표제작 「축복받은 집」을 비롯해 이 책에 실린 아홉 작품이 전하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다. 벵골 출신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미국 토박이로 자란 그의 경계인적 위치가 이를 가능하게 한다. 이제는 식상한 말일지도 모를 ‘경계인’이라는 말은 줌파 라히리에게는 여전히 유효한 의미를 띤다. 어쩌면 경계인이라는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마지막 세대의 대표 주자인지도 모른다.
아이를 사산한 부부 사이(「일시적인 문제」), 속한 국가는 다르지만 같은 말을 쓰는 지인 사이(「피르자다 씨가 식사하러 왔을 때」), 아이가 다 컸다고 생각하는 부모와 자식 사이「센 아주머니의 집」), 불륜 관계인 연인 사이(「섹시」) 등 『축복받은 집』에는 한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들 사이에는 서로 인지하지 못하는 상처가 있다. 작가는 이들 사이에 서서, 그리고 이들과 독자의 사이에 서서 ‘통역사’를 자처한다.

 

“그것 말고요. 다른 직업인 통역사 말이에요.”
“하지만 우리 사이엔 언어 장벽이 없잖습니까. 통역사가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그런 뜻이 아니에요. 그렇지 않다면 당신에게 이 얘기를 절대 하지 않았겠죠.”

110쪽, 「질병 통역사」에서

 

그러면서 아주 사적이고 한정된 의미를 지녔을지도 모를 개개인의 질병을 만인의 질병으로 각인한다. 저마다 불행한 사정은 다르지만 각자가 느끼는 고통의 정도는 비슷하며, 그 근본적인 원인도 결국은 비슷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전에는 이러지 않았다. 이제 그는 그녀의 관심을 끌 만한 이야기를 하려고 무척 애써야 했다. 그녀가 음식 접시에서, 아니면 교정지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게 하는 이야기를 하려면 말이다. 결국 그녀를 즐겁게 하려는 노력을 포기했다. 그는 침묵에 개의치 않는 법을 배웠다.

30쪽, 「일시적인 문제」에서

 

각 작품은 특정 화자의 내밀한 이야기를 담지 않았기에 건조해 보이면서도, 대화 사이에 예기치 않은 신랄함이 번뜩인다. 떠나온 사람과 정박한 사람 사이, 떠나온 사람과 떠나온 사람 사이, 정박한 사람과 정박한 사람 사이의 이야기가 저마다 남 이야기 하듯 그려지며, 그 안에서는 어김없이 길들여진 사람과 낯선 사람이 만난다. 낯선 사람은 길들여진 사람들로부터 보살핌을 받기도 하고(「비비 할다르의 치료」) 배척당하기도 한다(「진짜 경비원」). 서로 길들여진 사람들이 멀어지기도 하고 낯선 사람들이 서로를 길들이기도 한다(「축복받은 집」). 이들은 부부 사이로, 연인 사이로, 부모 자식 사이로, 친구 사이로 다양하게 명명되지만, 결국 서로에게 낯선 사람일 뿐이다.


 

그럼에도 삶은 놀랍다

아이 같은 시선으로 볼 수 있다면

 

“아줌마는 섹시해요.” (…)
“그게 무슨 뜻이니?” (…)
아이가 갑자기 부끄러워하며 고개 숙였다. “말할 수 없어요.” (…)
입가에 손나발을 만들더니 조그맣게 말했다. “그건 알지 못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뜻이에요.”
172~173쪽, 「섹시」에서

 

낯선 사람은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길들여진 사람에게는 익숙한 장소와 언어를 새롭게 환기한다. 「섹시」에서 미랜더는자 데브에게서 ‘섹시하다’는 말을 듣고 설레는 기분을 느낀다. 그런데 같은 말을 어린아이 로힌에게서 듣고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데브는 기억하지도 못하는 의례적인 그 말을 로힌은 마치 진실한 애정의 언어인 것처럼 건넨다. 아이와 대화하며 미랜더는 자신이 새롭다고 느낀 데브와의 관계가 상투적이고 가벼운 불륜 관계일지 모른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익숙한 일상어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는 이러한 환기는 나이가 많고 적음을 떠나 어린아이의 시선을 지녀야만 가능하다.
줌파 라히리 식 ‘낯설게 보기’는 「센 아주머니의 집」에서도 드러난다. 인도에서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온 센 아주머니는 미국 아이 엘리엇보다 나이가 곱절이 넘게 많지만 생활은 더 어리숙하다. 개인의 대소사를 함께하는 인도와 달리 어린 나이에도 혼자 지내는 게 익숙한 미국의 삶이 익숙지 않다. 남편은 센 아주머니가 운전면허를 따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으면 나아질 것이라고 하지만, 사람이 아주 많아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이 기이한 곳에서 그가 가고 싶은 곳은 없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서로 너무나 무관심한 곳에서 센 아주머니는 길들고 싶지 않다. 자신에게는 익숙한 세계를 낯설게 바라보는 센 아주머니를 통해, 어린 엘리엇이 오히려 새로운 자극을 받는다.

 

매일 아침 지루한 울음소리로 잠을 깨우는 갈매기들도 지금은 물을 박차고 날개를 퍼덕이며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모습에 엘리엇은 흥분되었다.
203쪽, 「센 아주머니의 집」에서

 

한편 「세 번째이자 마지막 대륙」에서 말라는 남편의 전 하숙집 주인인 백인 할머니의 “굉장하군”이라는 외침 속에서 동질감을 감지한다. 한곳에서 백 년을 넘게 산 할머니에게 여전히 놀라운 일이 있고 여전히 새로운 일이 있다는 것은, 전혀 알지 못하는 장소에 떨어져나와 모든 게 새로운 말라에겐 위안이 된다.

 

“어떻게 생각하나, 젊은이?”
나는 깜짝 놀랐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전혀 망설이지 않고 소리쳤다. “굉장해요!”
그러자 말라가 웃음을 터뜨렸다. (…) 눈은 즐거움으로 반짝였다. 그녀의 웃음소리를 들어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304쪽, 「세 번째이자 마지막 대륙」에서

 

그러나 줌파 라히리는 이 놀라움을 질병의 치료약으로 삼으면서도 만병통치약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가 아는 한” 치유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무언가에 이미 길들여진 사람들은 어린아이가 느끼는 경이로움을 온전히는 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줌파 라히리는 어린아이의 시선을 지닌 이들을 “애틋한 아픔”이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그렇게, 결코 이어질 수 없는 낯선 사람과 길들여진 사람 사이에서 끊임없이 통역의 한계를 느끼며 괴리를 극복하고자 한다. 한계와 극복 사이에서 줌파 라히리는 ‘그럼에도’라는 반전을 품으며 문학을 가능성으로 제시한다. 경계에 서 있는 그의 시선은 언제나 한계를 포착한다. 그 한계가 또 어떻게 문학적 언어로 탄생할지, 우리가 그의 다음 작품을 기대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추천사

 

줌파 라히리의 소설은 가족, 친구, 연인 등 모든 인간관계에 내재한 ‘사랑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폭력’을 섬뜩하게 드러냄으로써 사랑보다 더 깊은 관계의 심해로 우리를 초대한다. 그리하여 그의 소설은 결국 ‘사랑에 빠지지 말라’는 경고가 아니라 ‘그럼에도 뜨겁게 사랑하라’는 달콤한 유혹으로 다가온다. 이토록 아프지만, 이토록 불안하지만, 그래도 사랑할 수 있는 오늘이야말로 우리 생애 최고의 축복이니까.

정여울 문학평론가